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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파키스탄의 덫'에 걸린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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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파키스탄의 헌정(憲政) 중단 사태에 대해 침묵하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6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육군 참모총장을 겸하고 있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지 나흘 만이다.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 검거 선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나온 부시의 메시지에는 가시가 없었다. “총선이 최대한 일찍 치러지길 바라고, 무샤라프 대통령은 약속대로 군복을 벗어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 표명이었다. 연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경제 지원 중단 가능성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파키스탄 민주주의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지만 미국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핵무기를 가진 유일한 이슬람 국가가 파키스탄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군부 실권자의 부재(不在)는 핵 통제권의 실종과 이슬람권으로의 핵 확산을 의미할 수 있다고 미국은 불안해한다. 그래서 철권 통치자 무샤라프는 미국에 ‘필요악’ 같은 존재다. 민주주의의 확산이란 대의명분과 충돌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본다.

  파키스탄은 1998년 5월 핵실험을 했다. 인도가 핵실험을 한 지 18일 만이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나와즈 샤리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핵실험을 하지 말라고 30분이나 설득했다. 그러나 통화가 끝나고 7시간 뒤 샤리프는 핵실험 단추를 눌렀다. 이슬람권 최초의 핵 보유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샤리프의 논리는 간단했다.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못 하게 하려면 인도의 핵실험을 미국이 막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세 번씩이나 전쟁을 치른 적국(敵國) 인도가 핵 보유국이 된 이상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국가안보상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냉전 시절 미국은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인도의 핵 무장을 묵인했다. 위기를 느낀 파키스탄은 자력으로 핵 개발에 나섰다. 미국은 파키스탄이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두고두고 미국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 실수였다.

  1억6500만 인구의 97%가 무슬림인 파키스탄은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다. 중국·인도·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북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어져 있다. 인도양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유라시아의 발칸’인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나라가 또 파키스탄이다. 끓고 있는 호리병의 마개인 셈이다. 인접국인 이란이 핵 무장에 성공하게 되면 이슬람 핵 벨트가 출현하게 된다.

무샤라프는 부시가 수행 중인 ‘테러와의 전쟁’의 핵심 파트너다. 무샤라프가 협조를 거부하면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탈레반과 알카에다 수중에 넘어갈 공산이 크다.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는 파키스탄의 핵 보유국 지위를 사실상 인정하고, 110억 달러의 돈을 쏟아 부으며 무샤라프 정권을 돕고 있다.

  무샤라프는 현직 육군 참모총장의 대통령 피선거권 보유 여부에 관한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직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피선거권이 없다는 결정을 대법원이 내렸을 경우 예상되는 정치적 혼란을 생각하면 미국은 ‘제2의 쿠데타’를 감행한 무샤라프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다. 민주화를 통해 문민 통치가 정착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불안과 혼란의 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무슨 변고가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부 독재자를 지지하는 미국의 행태는 파키스탄 내 반미주의의 불씨가 되고 있다. 무샤라프와 미국에 대한 반감은 이슬람 극단주의와 테러를 조장하고 있다. 이로 인한 혼란이 핵 통제권의 실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미국은 더욱더 무샤라프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반미주의가 더욱 고조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파키스탄의 덫’에 걸린 미국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