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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인물도 정권말 '대못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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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고액권 도안 인물로 10만원권에는 백범 김구,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이 선정됐다고 한국은행이 5일 발표했다.

한은은 정부 승인-금융통화위원회 의결을 거쳐 연말까지 화폐 뒷면의 보조 도안을 확정한 뒤 2009년 상반기에 고액권을 발행할 예정이다. 한은은 5월에 고액권에 들어갈 20명의 후보 인물을 선정한 뒤 여론조사와 전문가 의견조사를 통해 10명으로 압축했다. 한은은 마지막으로 이들 가운데 김구.신사임당.안창호.장영실 등 4명을 뽑아 정부와 협의를 벌여 왔다.

이승일 한은 부총재는 "김구 선생은 독립지사에 대한 존경과 애국심을 높이는 데, 신사임당은 양성 평등의식 고취와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한 긍정적 인식 확대에 기여할 것"이라며 선정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인물 선정 과정에서 인기투표식 방식이 동원됐고 이해단체 간의 갈등을 부추겨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미리 짜인 시나리오대로였다"=한은의 결정에 대해 "처음부터 다 결정해 놓고 호들갑만 떨었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5월 화폐도안자문위원회가 20명의 후보군을 선정할 때부터 한은 안팎에서 김구.신사임당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한은 고위 관계자는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건국의 상징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초상 인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됐지만 찬반 양론이 거셀 것으로 보여 20명의 후보군에 아예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군을 미리 배제한 것이다.

여기에다 노무현 대통령과 범여권의 김구 선생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인물 선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정권 말기에 화폐 도안 인물마저 '대못질'을 했다는 의구심이다. 노 대통령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링컨과 함께 김구 선생을 꼽았다. 신년연설(지난해 1월 18일) 식장도 청와대나 방송사가 아닌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을 선택했다. 10월 방북 때는 노란 선을 그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김구 선생의 행적을 연상시켰다.

옛 열린우리당도 백범기념관을 자주 이용했다. 2005년 초 열린우리당의 첫 중앙위원회의, 지난해 3월의 전당대회 예비선거도 그곳에서 치러졌다. 한 소식통은 "오래 전부터 현 정권의 386 실세 그룹을 중심으로 김구 선생을 화폐 인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전했다.

◆밀실 선정 논란=화폐 인물은 국가의 상징인데도 한은은 공식 청문회를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승일 한은 부총재는 "공청회를 열면 수십 명의 후보가 난립해 결국 흠집 내기식 토론으로 변질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론 분열을 우려해 공청회를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은은 인터넷을 통해 미리 선정된 후보군을 대상으로 인기투표식 여론조사를 강행해 국론 분열과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기에다 한은은 선정위원들의 명단 공개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서울대 사범대 윤리교육과 박효종(정치학) 교수는 "정권 말에 고집을 부리듯이 고액권 인물을 결정했다"며 "이번 결정은 국민 화합이 아니라 불협화음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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