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책값과 술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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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술은 왜 마셔요?』술마시는 주정꾼에게 어린 왕자가 묻는다.
『잊어버리려고 마시지.』주정꾼이 대답한다.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뭘 잊어버리려 하는데요?』『창피한걸 잊어버리려고 그러지.』『뭐가 창피한데요?』『술마시는 게 창피하지.』어린 왕자는 머리를 갸웃거린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가 쓴『어린 왕자』의 한 장면이다.어린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라는 점을 우화적(寓話的)으로 그려내고 있다.어린이들이 미친듯이 술을 마셔대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래도『어린 왕자』속의 주정꾼은 「술마시는 것이 창피한 일」임을 깨닫고 있으니 그나마 양심적인 술꾼인 셈이다.대부분의 술꾼들은 즐거워도 괴로워도,기뻐도 슬퍼도 술속에 파묻혀 산다.한국민학교 어린이가 작문에서 이렇게 쓴 것을 읽은 일이 있다.『아버지는 허구한날 술에 취해 들어오신다.나는 동화책을 좋아해 책을 읽고 있는 때가 많은데 술취하신 아버지는 그때마다 공부는않고 쓸데없는 책만 읽는다고 야단치신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책을 읽지 않아 저 렇게 술만 잡수시는것은 아닐까.아니면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저렇게 술꾼이 되셨으니 책은 읽지 말고 공부만 해야 술꾼이 되지않는다는 걸 가르쳐주시려는걸까.』 이 어린이에게는 독서 혹은 책과 술의 관계가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하기야 퇴근하는대로 곧장 귀가(歸家)해 자녀들에게 책읽은 모습을 보여주는 직장인들이 과연 얼마나될는지 생각해 볼만 하다.가장(家長)의 귀가를 기다리는 주부나자녀들은 저렇듯 마셔대는 술값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그 돈으로 책을 산다면 몇권이나 살 수 있는가를 마음속으로 따져보기도 할 것이다.
한 대기업이 독서(讀書)의 계절을 맞아「술과 책」을 주제로 사원들에게 설문조사한 것을 보면 한달 평균 술값지출이 12만3천여원인데 비해 평균 도서구입비는 그 10분의1에 불과한 1만2천여원으로 나타났다.1만2천원이면 보통 도서 2 ~3권 값에해당하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겠지만 아무래도 술값에 비하면 적어도 너무 적다.때마침 이번 9월은 첫「독서의 달」인데 도서 판매량은 다른 달에 비해서도 크게 떨어졌다는 소식과 함께 생활화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독서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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