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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초등학교 경제교육 현장을 보니 점심 도시락 반찬 경매하기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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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24면

일러스트=강일구

미국 콜로라도주 볼더 카운티의 크릭사이드 초등학교 점심시간. 식당에서 음식들을 받아 든 학생들 사이에 갑자기 흥정이 벌어졌다. 이날 나온 음식 중 핫도그를 먹지 않겠다고 하는 학생이 나타나자 다른 학생들이 서로 사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경쟁 끝에 핫도그는 12달러에 팔렸다. 이때 쓰인 화폐는 공식 달러가 아닌 5학년 트레토 선생님 반에서 만든 ‘학급화폐’(5th Dimension Money)였다. 학교에서 시행하는 경제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초등학생들이 생활경제를 실감나게 익히고 있는 미국 교육 현장의 모습이다.

트레토 선생님 반의 학생 수는 20명 남짓이다. 특이한 게 있다면 모든 학생이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이라고 해도 의사·변호사·교수처럼 학생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게 아니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각자 맡아 하고 있는 일이 곧 직업이다. 직업은 담임 선생님이 본인의 희망을 고려해 정해준다. 직업 하나하나는 한 학급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여러 일들을 적당한 단위로 쪼갠 것으로 이들의 지혜와 노하우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재생(Recycle) 담당자는 학생들이 하루에 쓴 종이를 모아 청소시간에 체육관 옆 재활용 통에 넣는 일을 한다. 의자 쌓기 담당은 청소 시간에 의자들을 뒤쪽에 쌓아두는 일을 한다. 그러면 진공청소기 담당자(Cleaner)가 카펫을 진공청소기로 민다. 물고기 키우는 직업(Fish Feeder)은 어항 속의 물고기에게 매일 먹이를 줘야 하고, 필름 청소 담당(Overhead Projector Cleaner)은 수학시간에 쓰는 프로젝터의 필름을 씻어 재활용할 수 있게 하는 일을 맡고 있다. 또 ▶아침마다 학생들이 그날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지 조사한 뒤 결과를 식당에 보고하는 직업(Lunch Count)▶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상자에 모은 뒤 점심시간에 식당으로 운반하는 직업(Lunch Box) ▶금요일에 가정통신문을 나눠주는 직업(Friday Folder) ▶책들을 책꽂이에 정리하는 직업(Library) ▶옷걸이를 정리하는 직업(Closet) 등도 각각 1~3명이 맡고 있다. 학습지 나눠 주기, 쓰레기통 비우기 같은 일도 있고, 각 직업 담당자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를 점검·평가하는 감독(Supervisor)도 있다.

학생들에게는 매주 금요일 청소시간에 주급(8~35달러)이 직업에 따라 차별 지급된다. 성과급이 있어서 일을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는 주급을 기본급 외에 더 주고 반대로 일을 잘 못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학생에게는 기본금보다 적은 주급을 지급한다. 감독은 가장 고급스러운 일자리다. 기본급이 가장 많은 30달러에 달한다. 처음 직업을 정할 때 감독을 지원했다가 탈락한 몇몇 학생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직업을 바꿔달라는 학생은 없었다고 한다.

주급으로 준 돈은 교실에서 실제 화폐처럼 가치가 있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특징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 주급을 받은 학생들은 이날 열리는 가게에서 학용품을 살 수 있다. 물론 학용품을 사지 않고 저축할 수도 있다. 이때 주급을 지급하고 학용품을 파는 직업은 뱅커(Banker)라고 불린다. 학생들은 뱅커를 통해 선생님에게 매주 교실 사용료로 8달러를 지급해야 한다. 담임 선생님마저 이 프로그램에서는 교사에서 부동산임대사업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뱅커는 금요일에만 일하므로 주급이 많지 않아 10~15달러 정도를 받는다. 학용품 가격은 물건마다 달라 폴더 15달러, 스티커 북 17달러, 샤프펜슬 3달러, 연필 1달러, 샤프심(20개) 5달러, 연필에 끼워 쓰는 지우개 1달러, 연필 미끄럼 방지 고무 1달러, 컬러연필세트 12달러, 연필깎이 8달러, 형광펜 3달러 등이다. 이런 학용품은 누가 공급하는 걸까. 학부모와 지역사회에서 기부한 돈을 학급 단위로 쪼개 쓴다고 한다. 지난 9월에는 학생들이 서로 학용품을 사겠다고 경합해 ‘공급 부족’이 발생하자 한 번에 두 가지 물건만 살 수 있다는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필요에 따라 새로운 규칙과 제도 개선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학급화폐는 월드시리즈 야구경기가 벌어졌을 때 내기용으로도 쓰였다. 학생들이 학급화폐를 내기에 써도 되느냐고 유권해석을 의뢰했고 선생님이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은 트레토 선생님에게 매번 벌금을 내야 한다. 교실 컴퓨터 주변을 청소하는 직업을 가진 한국인 학생 허재만(10)군은 “교실 사용료를 내고 남는 5달러를 털어서 학용품을 구입하다 보니 지금까지 저축한 돈이 1달러뿐”이라며 “혹시 벌금 낼 일이 생길까봐 숙제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벌금은 매회 5달러였으나 숙제를 안 하는 학생들이 계속 나오면서 이번 주부터 10달러로 인상됐다. 또 숙제를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해오지 않은 학생에게는 금요일 가게에서 아예 물건을 살 수 없도록 했다. 허군은 “이번 주에는 핼러윈(10월 31일)이 끼여 있어 숙제를 두 번 이상 못한 아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법을 어겼을 경우 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다. 이 학교 관계자는 “아이들이 흥미롭게 사회 생활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행하는 프로그램”이라며 “학생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직업과 소비, 규칙 준수가 왜 중요한지 스스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교육에 적용하려면

이 같은 경제교육과 유사한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도 ‘화폐 놀이’ ‘시장 놀이’ ‘체험 화폐’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점이라면 미국의 경우 1년 이상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학생들의 실생활과 직접 연계돼 있다는 것이다. 하루 이틀 경험해 보거나 물건을 사는 시늉을 해보는 놀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제 가치가 있는 학급화폐를 매개로 실제 사회생활과 비슷한 체험을 장기간 해볼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다. 또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참여 역시 이 프로그램이 굴러갈 수 있게 하는 동력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같은 미국 경제교육 프로그램을 지켜본 한국인 학부모들은 “미국 학부모가 학용품 지원이나 기부금 등을 통해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자신의 아이에게 왜 고급 직업을 주지 않느냐는 식의 항의를 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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