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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종교가 ‘2% 종교’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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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2000년 세밑이었다. 가수 조영남이 펴낸 따끈한 신간 ‘예수의 샅바를 잡다’(나무와 숲)를 읽다가 “옳다구나!” 싶었다. 흔한 신학 에세이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2000년 전 유대 땅 예수란 사나이 못지않게 지금 이곳에서 질문을 던지는 한국 땅의 저자 자신도 중요했다. “대체 나에게 예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때문에 서로의 샅바를 움켜쥔 기 싸움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했다. 다음 대목이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 김정신 권사님은 김 권사님이고 나는 그저 나(가수 조영남)일 뿐이다. 김 권사님한테는 (종교) 선택권이 별로 없었고, 나한테는 아직도 선택권이 무진장 있다. 어머니는 예수라는 물건을 즉시 구매했고, 나는 지금도 이 물건 저 물건을 살피는 중이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도 좋고 차라투스트라도 좋다. 어머니는 예수라는 보세 가공품 하나로 행복했지만, 아들은 후미진 곳에 틀어박혀 있는 최제우, 최시형, 강증산, 나철, 전봉준 같은 국산품이 못내 안쓰러워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예수의 샅바를 잡다’는 재출간본이었다. 본래 1980년대 초 ‘태백산맥’의 소설가 조정래씨가 ‘한국 청년이 본 예수’라는 제목을 달아 세상에 등장시켰다. 썰렁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넘어간 지 20년 가까운 시점에서 새 단장한 개정본을 선보였다. 조영남은 개정본 저자후기에 보석 하나를 박아놓았다. 소수 종교로 밀려난 지 오래인 민족종교에 갖는 수줍은, 그러나 아찔한 높이의 애정고백을 털어놓은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조영남은 목사 안수를 받았던 위인이다. 미국 유학까지 했다. 그것도 보수 신학의 본산 트리니티 침례신학교였다. 그곳 입학은 1970년대 초 한국을 방문했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만난 인연 때문이었다.

그가 서울 여의도 땅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정말 대단했던 부흥집회를 열 때 복음성가 가수로 뽑혀 그레이엄 목사를 뻑가게 했다. 어쨌거나 개신교 모태 신앙을 가진 조영남에게 민족종교 짝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왜 나철이오?”하고 그에게 물어보라. 당장 거품부터 물 것이다.

“대종교의 나철과 증산도의 증산은 내 눈에는 한 집안이야. 즉 구한말의 멋쟁이들인데, 단 가는 길이 조금 달랐을 뿐이야. 증산은 유교·민간신앙·천주교까지 모두 끌어들여 그걸 서까래·대들보로 쓰면서 어마어마한 ‘우주의 종교’를 만들었어. 스케일이 이만저만 아니지. 나철? 그분은 또 달라. 100% 토종이야. 그저 단군 깃발 하나만 쳐다보고 평생을 살다 간 거야. 증산이 우주를 감싸안을 정도로 글로벌하다면, 나철은 신토불이야. 당신이 보세 가공품 종교가 껄끄럽다면, 남은 것은 선택이야. 각자의 취향에 따라 나철도 좋고 수운이나 증산도 매력적이고…. 안 그래?”

‘우주의 종교’를 만들려 했던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1871~1909)이 오는 29일로 탄생 136년을 맞는다. 공교롭게 바로 하루 전인 28일은 천도교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964)의 탄생 183년이다.

예수와 붓다의 탄생일을 성탄절로 기념하듯 민족종교 지도자들의 탄생일도 증산도 본부가 있는 대전과 천도교의 수운회관 등에서 각별하게 기념된다. 하지만 떠들썩하지는 않다. 조용하게 교단 내부 행사로 그친다. 불교·기독교·유교 등 거대 종교들이 주류로 자리잡은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뭔가가 이상하다. 민족종교 지도자라는 카테고리를 떠나 구한말·일제하 걸출한 역사 인물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서세동점의 기운 앞에 더없이 무기력했던 구한말의 몰락은 벽력 같은 사자후(獅子吼)를 토해 냈던 ‘민족종교맨’이 없었더라면 더욱 쓸쓸했을 텐데도 그렇다.

수운·증산을 포함한 천도교의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 대종교의 나철(羅喆·1863~1916), 원불교를 일으켰던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은 아직은 대중에게 익숙하지 못하다.

종교별 인구 분포로 보면 이런 속사정이 더욱 극명해진다. 지난해 통계청은 가가호호 방문해 묻고 받아 적는 수작업 방식으로 ‘2005 국민주택 총조사’를 발표했다. 불교와 기독교(개신교+가톨릭)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못해 압도적이다.

종교가 있다고 응답한 2497만여 명(53.1%)은 무종교 인구 2186만여 명(46.9%)보다 약간 앞선다. 이 종교 인구에서 불교·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물경 51.8%다. 그러니까 종교가 있다는 사람의 97.6%가 불교와 기독교 신자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나머지인 전 인구의 1.3%, 혹은 종교가 있다는 사람 중 2%를 토대로 민족종교가 살아간다는 셈이다. 물론 독차지도 못했다. 이슬람교나 통일교 등 ‘기타 종교’ 틈새여서 사정없이 비좁다.

구체적으로 원불교는 12만9907명, 유교는 10만4575명, 천도교는 4만5835명, 증산교는 3만4550명, 대종교는 3766명으로 나타난다. 참고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기독교나 불교가 아니고 민족종교도 아닌 ‘기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36만8593명으로 나타났다.

물론 종교 인구란 본래 ‘고무줄 통계’로 유명해 자체 집계로 따지면 갑절은 물론 수십 배로 뜀박질하는 경우가 예사다. 종교단체가 자체 조사한 신도 수를 모두 더하면 한국 인구는 순식간에 1억 명을 넘어선다.

불교의 경우 자체 집계로는 공식 통계의 4배에 가까운 3749만여 명이라 하고, 개신교는 갑절을 살짝 넘긴 1872만여 명이라지만, 유교의 경우 600만 명이다. 600만 명이란 인구센서스(10만4575명)의 60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황당하다. 하지만 통계가 부풀려졌다고만 얘기하기도 힘들다. “한국은 지구촌에 거의 유례없는 다(多)종교국가”(윤이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인 데다, 한국적 현상인 ‘기천불 신도’까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신자는 아니지만, 각 종교에 두루 친연성을 보이는 ‘기독교+천주교+불교’ 신자가 기천불 신도다. 여기에 한국인 마음의 풍경에는 유교·무속까지 광범위한 기층(基層)을 이룬다. 그 상징이 지난 7년 전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다.

‘행동하는 유림’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맞서 반독재의 선봉에 섰던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의 묘소 앞에서 그는 선뜻 큰절을 올려 유림·신부 모두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참신(參神), 종헌(終獻), 사신(辭神) 세 차례에 걸쳐 재배를 깍듯이 올렸다. 그건 1960년대 초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자, 종교적 관용의 아름다운 상징이었다. 더 중요하게는 그런 행동이 다분히 한국적 다종교의 배경에서 나온 넘나들기였다는 점이다.

“유독 한국사에 유럽 역사에서 흔히 보는 종교전쟁이 없었던 까닭도 굳이 관용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마음에 밴 성정 때문”이라는 게 윤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의 합의다.

지난여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한국인 인질이 잡힌 자체가 한국사의 맥락에서 보자면 매우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거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민족종교 푸대접’은 너무 심하다. 일제 초기와 해방 전후에 비춰 종교 지도는 너무도 많이 변해 버렸다.

학계에서 활발한 민족종교 재조명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속된 얘기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근현대의 문을 열어젖힌 저력은 민족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나왔다. 3·1운동 당시 천도교 3대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의 역할은 세상이 다 안다.

지식사회를 이끄는 권위도 대단했다. 1920년대 초반 소파 방정환 등이 편집을 맡았던 천도교 잡지 ‘개벽(開闢)’의 영향력은 당시 동아일보 등 일간지보다도 강력했고, 1950년대, 60년대의 ‘사상계’ 의 영향력을 크게 웃돌았을 정도다.

물론 천도교 거점이 서북지방(황해도 평안도)이라서 분단의 상처도 컸다. 거기에 일제 통치라는 환경은 최악이었다. 물론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가 최대 피해자였으나 거꾸로 상해 임정의 구성원 자체는 대종교 신자 일색이었다.

의정원의 이동녕 의장을 포함해 의원·각료의 반수 이상이 교도였다. 해방 후 미군정 민정장관도 대종교 원로인 안재홍이었고, 정부 수립 후 초대내각의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문교장관 안호상, 감찰위원장 위당 정인보, 심계원장 명제세 등은 대종교 원로들이었다.

명망 높았던 그들은 교육문화의 인프라에도 남다르게 힘을 썼다. 홍익대 재단은 대종교가 만들었고, 이시영은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대를 설립했다. 단국대 설립도 대종교 원로 장형의 손으로 이뤄졌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0.5% 민족종교’라는 현재의 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동양사 총통’으로 불렸던 고 민두기 서울대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인구의 1%를 넘어섰을 때는 1910년대 직후”(유고집 ‘시간과의 경쟁’)였다는데, 지난 1세기 사이에 왜 이런 역전현상이 그렇게 두드러졌을까?

증산·수운·해월·나철·소태산이 ‘고려 때 사람’ 정도로 기억되는 형편에서 전 한신대 김상일(철학) 교수의 일갈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에 따르면 지금의 우리는 “글로벌 시대에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세계화 콩깍지’가 씌워진 문화적 아큐(阿Q)란다. 아큐? 오래전 중국의 뤼순이 지적했던 문화 청맹과니라는 비유다.

강호학파를 자처하는 동양학자 조용헌(전 원광대 교수)의 주장도 그러하다. 근대학문이라는 관점에서 20세기 한국 대학은 성공보다 실패 쪽이다. 왜 19세기 지성사의 드라마인 민족종교를 끌어안지 못한 채 바다 건너 수입학문에만 매달렸는지 안타깝다는 지론이다.

또 요즘 인문사회학의 쟁점은 유럽 중심주의다. 철 지난 제국주의가 중립을 가장한 채 학문 내부에 똬리를 튼 상황에서 민족종교 외면은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조용헌은 민족종교를 인문학의 방법론으로 끌어들이는 쪽에 한 가닥 희망을 건다.

“중국 ‘한서’의 비유를 떠올려 보라. 곤륜산 물줄기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지하로 숨어들어간 뒤 잠류(潛流) 수 천리를 거친 뒤에야 불끈 솟아 황하를 이룬다. 일제 강점기, 해방과 산업화가 덮친 20세기 내내 숨어있던 민족종교가 그렇게 솟구쳐 오르는 법도 있다.”

함께 경청할 지적은 문화인류학자 조흥윤(한양대) 교수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현상적으로 소수종교이자 비주류 문화로 머무르는 듯 보이지만, 그게 결코 전부는 아니다. 한국인 마음에 민족종교는 문화원형의 하나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한국사회는 묘하다. 겉으로 드러난 주류가 전부가 아니다. 비주류 영역에 대한 해독이 더 중요하다. 기표(시니피앙)보다 기의(시니피에), 즉 기호 뒷면이 중요한 사회다. 그렇게 숨어있는 게 한국문화의 원형이다. 민족종교는 한국문화의 원형이 다량으로 녹아 있는 거대한 영역이라서 그에 대한 해독 없이는 한국사회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한국인의 마음에 민족종교는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세계화 시대인 지금도 그것의 이해 없이 한국사회를 온전히 해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국내 학계가 민족종교를 전혀 외면하지는 않았다. 시인 김지하, 동양학자 도올 김용옥 등의 선구적 작업이 있었다. 한신대 김경재(신학)·김상일(철학)교수, 연세대 오문환(정치사상사)교수 등도 귀한 연구를 내놓았다.

정치사상사 전공의 오 교수는 ‘해월 최시형의 정치사상’ ‘천지를 삼킨 물고기’ 등을 펴냈고, 신학자 김경재 교수는 기독교 신학과 민족종교의 만남을 모색해 왔다. 주로 비교종교학 작업이었다.

반면 철학 쪽의 김 교수는 ‘동학과 신서학(新西學)’ ‘수운과 화이트헤드’ 등의 수준 높은 역저를 통해 비교종교학의 수준을 넘어 일반이론 수준의 분석을 선보이기도 했다. 민족종교의 방법론을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40, 50대 중견 연구자들의 노력은 ‘민족종교와 학문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로 주목할 만하다.

‘정역’은 민족종교에 ‘논리의 날개’ 달기?

민족종교는 한국사회의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를 연결하는 연결고리다. 민족종교를 제대로 이해 못하면 근대 이전인 조선조 후기 사회도 파악되지 않고, 구한말-일제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흐름도 들여다보기 힘들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에는 “사랑채에는 ‘정감록’, 안채에는 ‘토정비결’”이라는 말이 있었다. 공식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은 제쳐둔 채 사람들은 서로 쉬쉬하면서 풍수도참 얘기를 주로 했다.

그만큼 풍수도참사상과 사주명리학은 사회 주변부를 배회하던 대안 사상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기대로 부글부글 끓기도 했는데, 특히 조선조가 사회 피로현상을 보이던 18세기 영·정조 시대 들어 ‘정감록’은 “새로운 지도자 진인(眞人)이 이미 태어났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전부였다.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서구 근대사회의 모더니티에 비춰 대안 사상으로서의 지평은 넓지 못했다.

원인은 ‘신비주의로 포장된 포퓰리즘’이라는 성격 때문으로 지적된다. 나쁘게 말해 혹세무민 과(科)였다. 딱 거기까지가 민족종교의 전사(前史)에 해당한다. 그 직후 서양 세력이 들어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됐다.

극도의 사회적 피로현상이 뚜렷했던 조선조 봉건사회, 서세동점이라는 ‘두 겹의 어려움’ 속에서 민족종교는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미 뚜렷한 논리와 세계관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풍수도참 사상과는 달랐다.

‘묻지마 신비주의’에 그쳤던 ‘정감록’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얘기다. 어떻게 해서 수운·해월·증산·나철 등이 대거 출현했을까? 이를 조선후기 한반도 차축 시대(axial age)라고 비유하는 종교학자들도 있다. 기원 전후 소크라테스·공자·예수·석가 등 현자(賢者)들의 대거 출현과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들 풍운아에게는 세례 요한이 있었다.

‘오실 그이’를 앞서 알렸던 선지자는 ‘정역’을 창시했던 주역의 대가 김일부(金一夫·1826~1898)였다. 선후천(先後天)이 바뀌는 우주 변혁이라는 큰 그림을 선보였다. 강렬했다. 우주가 지금의 낡은 세상(先天)에서 새로운 세상(後天)으로 변하도록 이미 예정돼 있다는 천둥소리였기 때문이다.

사람들 마음은 들끓었다. 출구 없는 에너지 덩어리에 불과했던 참설에 논리와 비전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사랑방에서의 쑥덕공론이 사회개혁· 종교개혁 사상으로 뻗어갈 수 있는 담론으로 아연 탈바꿈했다.

실제로 수운과 일부는 같은 스승을 모셨다. 연담 이운규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여기에 증산도 연결된다. 젊은 시절 천하주유를 하던 증산은 일부를 만나면서 자기 논리를 가다듬었다는 점이 ‘도전(道典)’에도 나온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은 수운·해월·증산에 비해 한두 세대 뒤에 태어나 일제 초기 원불교를 창립했지만 성장과정에서 천도교의 ‘동경대전’을 탐독했고 수운·증산의 후천개벽사상에 뜨겁게 공감했다.

소태산의 경우 “물질이 개벽됐으니 마음을 개벽하자”는 개교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는데, 그것 역시 수운·증산의 시대인식과 맞닿아 있다. 그들 마음의 원형은 닮은꼴이었다.

단 대종교의 나철은 달랐다. 기본적으로 그는 제도권 사람으로 사회생활에서 출발했다. 29세 때인 1889년 과거시험을 거쳐 엘리트 관료로 입신했다. 이후 벼슬을 던진 뒤 10년 입산수도를 거쳐 일제 강점기 초에 대종교를 세운다. 그는 단군 교화를 내세웠다.

즉 겨레의 시원 찾기와 함께 구국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그 역시 직전 민족종교 대선배들의 마인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민족종교는 천도교·대종교·증산도·원불교 구분 없이 모두 혁세(革世), 즉 사회개혁사상으로 이어진다.

논란의 여지는 있다. 과연 혁세사상을 근대적 사회사상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학자 백승종(푸른역사 대표)은 “분명한 것은 한국적 상황 속에서 사회개혁 모색의 한 출구가 종교적 비전, 환시(幻視)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이라고 밝힌다.

민족종교의 뼈대에 해당하는 후천개벽이란 지극한 유토피아론이다. 죽은 뒤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 땅을 무대로 이뤄지는 큰 잔치판이었다. 시인 김지하의 표현대로 시장의 성화(聖化)이자, 거룩한 세계의 속화(俗化)가 이뤄지는 드라마다. 서구 근대의 휴머니즘에 못지않은 인간선언의 속속 등장도 이때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이제는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더 높으니 바야흐로 인존의 시대라. 인간이 없으면 천지도 없고, 해와 달도 인간이 없으면 헛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증산에게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이 선언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포함한 근대 서구의 각종 인간선언에 비추어도 가장 힘차고 장려한 선언으로 평가된다. 증산의 선언은 수운·해월의 유명한 명제인 ‘향아설위(向我設位)’와도 이어진다.

해월은 1897년 전통적인 제사방식인 ‘향벽설위(向壁設位)’를 완전히 거꾸로 만들어 버린다. 제례를 지낼 때 벽을 향해 위패를 모시는 걸 뒤집어 ‘나’를 중심으로 제사를 올리자는 선언이었다. 하늘에 가득한 신명에 앞서 내가 주인공이라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그뿐인가. 민족종교에는 페미니즘의 흔적이 수두룩하다. “때는 해원시대라. 몇 천년 동안 깊이깊이 갇혀 있어 남자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던 여자의 한을 풀어 정음정양(正陰正陽)으로 하늘과 땅을 짓게 하겠다”는 말은 서구 여성운동사에 꿀릴 게 없는 여성해방 선언이다.

최근 들어 민족종교는 다양한 각도에서 재해석된다. 보편적 해방을 실현하려는 민족종교의 모색은 비교종교학에서 자주 거론된다. 수운·해월·증산·나철 등이 보여준 숱한 이적과 민중의 추종은 서구의 오랜 역사에서 등장했던 메시아운동(messianic movement)과도 외양상 흡사하다는 지적이다.

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던 중국에서 아편전쟁 이후 서구세력에 맞섰던 반발이 천년왕국운동으로 발전하는 경우와도 어느 정도 닮았다.

즉 사회정치적 개혁의 출구가 막혀 있을 때 등장하는 최후의 보루가 종교운동이라는 공통점을 한국의 민족종교는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얘기다. 그 점 때문에 삼국시대의 미륵신앙과의 비교도 활발하다. 미륵신앙이야말로 삼국시대 강력한 에너지를 분출했던 종교·사회적 이념이다.

미륵은 부처가 열반하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미륵불이 오시면 그분의 도에 들어가거라”(미륵상생경)고 했던 미래불이다. 이 때문에 희망의 부처, 젊은 부처인 미륵은 언제라도 떨쳐 일어날 수 있도록 항상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한국적 미륵신앙의 개창자는 지금도 호남 정서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진표 율사다. 조용헌 교수는 진표 율사를 ‘백제의 예수’라고 규정했다.

견훤과 궁예가 미륵을 자처했던 이유도 진표 율사의 등장 전후다. 왜 중국·일본에 비해 한국의 미륵신앙이 유독 체제변혁의 전투적 신앙인지도 연구대상이다. 그 뿌리가 구한말 민족종교로 줄기를 뻗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모순·대립·상극·투쟁의 선천세계가 끝나고 상생·화해·연대의 후천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갈망은 ‘모더니즘 이후’를 준비하는 탈 근대의 시각에서 새롭게 재평가된다. 한국문화의 원형으로서의 민족종교를 보려는 노력도 꾸준히 진행됐다.

이를테면 눈 밝은 국문학자 김열규(인제대) 교수의 경우는 수운과 증산의 입산 구도 과정을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신비체험과 비교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작업이다.

또 수운과 증산의 득도 과정은 동북아지역의 공통적인 전통적 수행 방법 전부를 함축하고 있다. 신선술을 위주로 한 전통적인 도가(道家)수행, 양명학 등 유가의 마음 공부, 에고(自我)의 소멸을 전제로 한 불교의 참선이 두루 포함됐기 때문이다.

‘열린 민족종교’는 어떻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합리주의·이성이라는 서구 근대의 ‘얇은 논리’의 일방적인 영향에서 이제 막 벗어나기 시작했다. 또 민족종교라는 기호를 선입견 없이 읽어낼 준비가 됐다.

1000년도 훨씬 전인 고대의 민간신앙과 불교 역사를 등에 지고, 당시 막 등장했던 ‘역사의 괴물’인 서구 근대마저 끌어안은 거대한 상징, 그것이 바로 민족종교다. 단 아직은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기보다는 주로 학계를 중심으로 한 일부 움직임에 그친다.

그러면 현상적으로 민족종교는 건강할까? 충분한 자생력이 있을까? ‘0.5%’라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을 만한 성장엔진이 있을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로는 소수종교로 머물지만 안정적인 교단 구조와 함께 경전, 정신적 구심체를 유지하고, 이미 배출된 성직자들의 활동도 눈여겨볼 만하다. 교단을 이끌어가는 장치 구축에는 문제가 없고, 여기에 세련된 방식의 선교활동도 속속 도입했다.

이를테면 대종교와 천도교가 다소 주춤할 때 증산도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새로운 선교방식을 채택해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뒀다.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연구서클 동아리를 조직했다. 젊은 피를 안정적으로 수혈 받으며, 참신한 기풍을 세우려는 몸짓이었다.

지금 증산도의 핵심을 차지하는 중견 멤버들은 바로 이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육성됐다. 가수 휘성 등 젊은 신자들의 존재도 희망적 요소다. 경전 ‘도전’의 외국어 번역 사업 등과 함께 해외선교도 활발하다.

현재 민족종교 중 가장 큰 세력을 유지하는 원불교의 경우 꾸준한 사회봉사활동을 병행하면서 따뜻한 사회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정상명 검찰총장 등 사회 지도층이 상대적으로 두터운 점도 가장 늦게 출발했던 이 종교의 앞날이 기대되는 측면이다.

하지만 종교학자들은 소수종교의 벽을 깨려면 보다 다양한 모색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느슨하면서도 유기적인 협의체인 한국민족종교협의회라는 조직을 구축했지만, 진정한 연대나 사회적 발언 등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왠지 낡은 종교라는 대중적 이미지도 떨쳐내야 한다. 그 점에서 다소 짙게 형성된 민족주의적 요소를 어떻게 떨쳐내는가도 장기적인 과제다.

민족주의적 요소의 탈각은 해외선교가 병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낙관론도 있다. 즉 세상의 모든 문명은 어차피 ‘옴파로스(배꼽) 증후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자기네 터전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고, 그것은 되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굳이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다.

상당수 민족종교들이 구사하는 ‘한반도는 지구의 혈처(穴處)’라는 식의 수사(修辭)는 모든 문명과 종교가 가지는 자기 중심주의 제스처에 불과하고, 앞으로 덩치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희석된다는 말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민족종교 재해석 작업이다. 학계는 물론 내부 성직자들의 탄력적인 경전 재해석과 현대화 노력이 필요한데, 아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런 현상이 오래 지속될 경우 수운·해월·증산·소태산 등의 삶과 사상이 교의(도그마)로 굳어지고 대중적 흡인력마저 떨어지는 결과를 빚어낼 수도 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내부 쇄신이 없을 경우 그런 동맥경화 현상을 간혹 보여 왔다. 그 점에서 각 민족종교는 중국의 영문학자 린위탕이 오래전 던졌던 다음 말을 각별히 기억해야 할 지 모른다. “나는 예수만을 등 뒤에 들쳐 업은 채 교회 문을 박차고 나왔다….”

에세이집 ‘생활의 발견’(1937년 간행)으로 유명한 그는 답답한 도그마에 갇혀있는 제도권 교회의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 때문에 기독교도와 이교도 사이를 오락가락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갈림길에 서있는 각 민족종교는 ‘예수(종교별 창시자)’와 ‘교회(제도권 종단)’를 동시에 유지·쇄신해야하는 공통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미국의 종교학자 로드니 스타크(베일러대) 교수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쟁과정을 다룬 최신간 ‘이성의 승리(The Victory of Reason, 미 랜덤하우스)’에서 지금 기독교권이 지구촌을 제패하는 이유는 자유로운 해석이 가미된 신학의 결정적 역할 수행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때 놀라운 문명을 가꿔 온 이슬람권이 근현대 이후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현상 안에는 지나친 근본주의적 율법 중심주의에 자폐적으로 갇힌 결과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열린 민족종교’야말로 의연한 과제다. 흔히 한국사회는 ‘종교 박물관’이라 불린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빠짐없이 다 있다는 얘기다. 종교시장의 지분 경쟁도 그만큼 심하다. 이 와중에 민족종교는 어떤 ‘열린 대응’을 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다.]

천도교

수운 최제우(1824∼1864)

동학의 교조. 경주의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총명함이 남달랐다. 본명은 복술(福述) 혹은 제선(齊宣)이다. 6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부친의 3년상을 끝내고 전국을 여행했다. 한학 말고도 활쏘기, 말타기, 의술, 복술에도 능했다.

1855년 금강산의 승려에게 ‘을묘천서’를 얻어 수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양산군 천성산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죽음으로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다가 57년 다시 적멸굴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구미산 용담정에서 수련하다 어리석은 세상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으로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쳤다.

1860년 신비한 종교체험 후에 동학을 창도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고 세력을 키웠다. 동학은 한울님을 모시면 누구나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시천주’와 사회변혁을 통해 지상천국을 건설한다는 ‘후천개벽’이 핵심사상이다.

수운은 서학을 신봉한다는 오해를 받자 은적암에 피신하며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는 ‘논학문’을 썼고 2대 교조 최시형에게 ‘동경대전’을 구술케 했다. 한글로 지은 포교가사집 ‘용담유사’ 중 일곱 번째 가사 ‘검결’은 변혁의지를 잘 나타낸 작품으로 처형의 결정적 이유가 됐고 갑오농민전쟁의 군가로도 불렸다.

증산도

증산 강일순(1871∼1909)

증산교의 창시자. 전북 고부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남의집살이와 나무꾼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결혼 후에는 훈장생활도 했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이 혁명은 실패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회혼란과 참상에 새 종교의 창설을 결심하고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을 모색했다. 유·불·선의 교리와 음양·풍수·복서·의술을 연구하고 신명(神明)을 부리는 도술과 과거·미래를 아는 공부에 매달렸다.

1901년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고 욕심·음란·성냄·어리석음을 극복해 도를 이뤘다고 한다. 상극(相剋)이 지배하는 선천시대의 원한을 해소하고 상생(相生)이 지배하는 후천세계를 건설한다는 ‘천지공사(天地公事)’가 증산교의 핵심 교리다.

증산교라는 명칭은 훗날 그의 호를 따라 만들어졌다. 증산은 ‘만고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했을 뿐이다. 1909년 갑자기 죽음을 예고하고 추종자를 모은 뒤 세상의 모든 병을 대속하고 죽었다고 한다.

민족항일기에 보천교로 계승됐고 신도가 600만 명에 이르렀다. 후천세계 예언서로 ‘현무경’을 남겼다. 증산은 교단의 창시자이자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종교

홍암 나철(1863∼1916)

대종교 초대 교주, 독립운동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29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관직에 있다가 일본 침략이 심해지자 사임했다. 1904년 비밀단체 유신회를 조직해 구국운동에 나섰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친선과 선린을 주장했으나 거부되자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귀국해서 매국노와 을사오적의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무안군 지도에 유배됐다. 고종 특사로 풀려난 후에 일본에 가서 외교적 구국운동에 매진했다. 이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에게 단군교를 포교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귀국하자마자 동지들과 서울 재동에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포했다. 1910년에는 신도가 2만여 명을 헤아렸으나 교단 내부 몇몇 인사의 친일행위로 내분과 일제탄압이 예상돼 대종교로 명칭을 바꿨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교리를 밝힌 ‘신리대전(神理大全)’을 발간했다.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해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교단이 존폐위기에 처하자 이듬해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했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1891∼1943)

원불교 대종사. 11세 때 ‘마당바위’에서 4년 동안 산상기도를 올릴 정도로 일찍부터 구도에 나섰다. 25세 때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 1916년에 큰 깨달음(大覺)을 얻고 물질문명에 끌려가는 인류의 정신을 구원하려고 종교운동을 시작했다.

교단 창립과 사회개혁의 첫 사업으로 아홉 제자와 저축조합을 만들고 허례폐지·미신타파·금주금연·근검저축 운동을 펼쳤다. 여기서 모은 자금으로 1918년 간척사업에 착수해 교단의 경제기초를 확립하고 인근 주민에게 농경지를 마련해 줬다.

종교적 인격수련도 계속해 정신과 육신을 아울러 튼튼하게 한다는 영육쌍전(靈肉雙全) 이념을 구현했다. 사업이 완료된 1919년에는 무아봉공(無我奉公)의 공익정신을 다지려고 특별기도를 실시했는데, 이기심 가득한 인간에게 대아실현(大我實現)을 보여주는 정신적 자각운동이었다.

선원을 설립해 교역자 양성과 신도 훈련을 병행했으며 상조조합을 개설해 생활안정, 주경야독, 근검저축의 공동생활을 펼쳐나갔다. 1943년에는 ‘불교정전(佛敎正典)’을 발행했다.

1943년 ‘생사의 진리’라는 설법을 마치고 열반했다. 일제말기 극심한 탄압으로 존폐위기에 이른 교단을 자신의 죽음으로 지킨 셈이었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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