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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쪽과 쪽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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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택시를 탔다. 크게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선판이 요동치고 있다”는 뉴스가 좁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목청을 돋워 행선지를 이야기하자 운전기사 양반은 라디오 볼륨을 살짝 낮추더니 이내 기다렸다는 듯이 ‘길거리 정치평론’을 펼쳤다. 대선주자들을 한 사람씩 화제에 올리며 자근자근 씹어 댔다. 마침 라디오에서 이회창씨의 출마 가능성을 점치며 그 측근들이 ‘스페어 타이어’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 운전기사는 곧장 이렇게 되받아쳤다. “요즘 자동차들 스페어 타이어는 새것 쓰지 헌것 안 써요.”

펑크난 것 때워서 스페어 타이어로 쓰던 시절은 지났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펑크난 것은 정말 곤란하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이회창씨의 측근들이 내놓은 궁색한 출마 가능성의 논리는 ‘스페어 타이어론’이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남은 대선에서 치명적인 정치적·물리적 상처를 입을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미리미리 대비하자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보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아집이 똬리를 틀고 있다. 궁색한 명분으로 감추려 하지만 다 보인다. 그 명분의 궁색함은 원칙을 깨고 금도를 넘어 꼼수를 찾다 보니 생기는 것이다. 평소 원칙에 목숨 건다는 ‘대쪽’ 이회창씨에게는 결코 걸맞지 않다.

이회창씨의 출마 명분을 둘러싼 측근들의 억지 춘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절이 ‘스페어 타이어론’이라면 이절은 ‘페이스 메이커론’. 여권 후보는 여럿인데 야권 후보는 혼자여서 집중 포화를 맞고 있으니 이를 분산시키고 한나라당 후보의 대선 완주를 위해 보다 전략적으로 대처하자는 주장이다. 전쟁할 때도 주공(主攻)이 있으면 조공(助攻)이 있듯이 투 톱으로 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당 후보의 대선 완주를 위해 한나라당을 탈당해 독자 출마한다? 명분도 안 서고 스텝도 꼬인다. 게다가 이회창씨는 일단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 페이스 메이커로 그칠 사람이 결코 아니다.

본래 페이스 메이커는 자신이 1등 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1등으로 만들기 위해 달리는 사람이다. ‘투르 드 프랑스’에서 7연패한 랜스 암스트롱에겐 매년 그 지옥의 레이스를 함께 달린 팀 동료들이 있었다. 물론 페이스 메이커로 나선 팀 동료들의 확고한 목표는 자신들의 우승이 아니라 암스트롱의 우승이었다. 하지만 이회창씨는 그렇게 할 뜻이 없어 보인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대선 완주를 엄호하겠다는 살신성인의 자세가 아니라 본인이 최후의 승자가 되겠다는 망상에 빠진 것 같다.

물론 생각은 자유고 출마도 자기재량이다. 정치는 생물인 까닭에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라이벌이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의 수’도 열려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생물로서의 정치다. 하지만 거기에도 원칙과 금도는 있다. 이회창씨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목숨처럼 지켜 왔다고 자임하는 사람 아닌가. 이인제씨 때문에 아파 봤던 사람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 자신이 제2의 이인제씨가 되려 한다.

도대체 그가 그토록 장고(長考)한다는 대의의 실체는 뭔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키겠다는 그가 결국 마지막 남은 정권교체의 희망마저 쪽박처럼 깨겠다는 건가? 그는 지금 소금 먹은 쥐처럼 물로 내닫고 있다. 입 안의 소금을 뱉지 않으면 결과는 물속에 빠지는 일뿐이다. 대쪽 이회창을 갈급하게 만든 것이 ‘노욕’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진정한 ‘고뇌’라면 그가 가야 할 길은 명분 없는 탈당과 출마 선언이 아니라 힘을 합쳐 주는 일이다. 밤새 머리 쥐어짜며 고민해 자기 죽을 꾀만 내는 경우가 있다. 대쪽 이회창씨의 장고가 자신은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를 쪽박 깨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