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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대국료 폐지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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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은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발굴한 당대 고수들의 기보(棋譜)를 들고 신문사 문턱을 발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일본 요미우리나 아사히처럼 신문 기전(棋戰)을 만들어 기보를 연재하자고 호소했다. “문화사업이니 광고료는 받지 않고 기보를 실어 주겠소.” 대단한 선심을 쓰는 체하는 신문사에 대국료 달라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1956년 탄생한 국수전의 첫 우승 상금은 5000원. 훗날 노년의 조 국수는 “상금이 억대가 넘다니, (우리 바둑계가) 많이 컸구나” 하고 허허 웃곤 했다.

그 땀의 결실은 본인보다 주로 후학들의 몫이었다. 명인·왕위·기왕전 같은 신문 기전이 속속 등장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김인은 왕위 7연패, 국수 6연패 등의 위업을 쌓으며 일세를 풍미했다. 성적을 내지 못하는 기사들도 푼돈이나마 대국료라는 걸 만져 봤다. 김인은 도연명의 시구를 즐겨 읊고 예도(藝道)를 목숨처럼 여긴 낭만파 주당이었다. 넉넉지 못한 동료 기사들을 수시로 챙겼다.

조훈현·이창호 등과 함께 세계 정상의 한국 바둑을 일군 천재기사 유창혁 9단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깜짝 발언을 했다. “대국료를 없애고 64강부터 상금을 주자”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다운 공격적 제안이었다. 대국료는 반세기 동안 무명 프로기사들의 생계 수단이었다. 이를 폐지하고 PGA 프로골프 투어처럼 치열한 경쟁 체제를 도입하자는 이야기다. 한국기원 소속 프로는 10대에서 70대 연령까지 220여 명. 대국료를 없애면 이 중 3분의 2 이상은 예선전에 나갔다가 교통비도 챙기지 못하고 돌아올 판이다.

원로 기사 중에는 “바둑 동네 인심이 언제 이토록 각박해졌느냐”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불혹을 갓 넘긴 나이에 선후배 간의 허리 역할을 하는 유창혁의 주장은 이미 상당한 지지 기반을 갖췄다고 한다. 한국 바둑은 지난해부터 세계 무대에서 ‘황사 바람’에 밀리는 형국이다. 우리 바둑 생태계에 큰 탈이 난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감돈다. ‘프로기사의 등용문과 퇴출로를 모두 넓히지 않으면 우리 바둑의 미래는 없다’는 진단이 힘을 얻는다. 신선놀음이라던 바둑은 갈수록 약육강식의 정글이 돼 간다. 상금과 대국료만 갖고 생활이 되는 프로는 이미 20%에 미치지 못한다. 나른한 오후 시간에 사이버 바둑 사이트의 낯모를 맞수와 수담(手談)을 나누는 5급짜리 애기가의 소박한 재미를 프로들이 부러워할지 모른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