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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김종학에서 최삼규·이영돈까지 ‘스타PD’ 의 현주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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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취향에 맞는 영화를 제 시간에 보려면 관객이 부지런해야 한다. 영화는 늘 문 열어두고 기다리는 듯하지만 준비(예약) 없는 손님에겐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 큰맘 먹고 오랜만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찾은 관객은 양자택일해야 한다. 발길을 돌리거나 표가 남아 있는 영화를 겨자 먹는 기분으로 들어가서 보거나.

예외가 더러 있지만 관객들이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대체로 세 가지다. 누가 나오느냐(배우), 어떤 이야기냐(내용), 누가 만들었느냐(감독). 송강호가 나오고 봉준호가 만든 괴물 이야기가 역대 최고의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걸 보면 흥행의 3박자는 여전히 솔직하고 담백하다.

리모컨을 쥔 시청자는 야박한 권력자다. 누가 나오면 곧바로 돌리고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잡힐 때까지 채널 순례를 계속한다. 누가 만들었느냐는 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영화처럼 텔레비전도 연출자 이름이 채널 선택의 한 요인이 될 수 있을까.

설문조사까지 할 일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태왕사신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연출가 김종학의 이름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과거 ‘모래시계’를 탄생시킨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만드는 회심의 역작이지만 배용준이라는 이른바 한류 스타가 없었다면 지금만큼 시청자를 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세기 말까진 PD시스템이란 말이 제법 쓰였다. PD의 개별 이름이 먹혔다는 게 아니고 PD라는 역할이 유효했다는 뜻이다. 지금은 달라졌다. 확실히 스타시스템이다. PD가 스타와 싸워(?) 이기려면 스스로 스타가 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신비감이 연예스타의 무기라면 신뢰감은 스타 PD의 덕목이다.

드라마에만 스타 PD가 있는 건 아니다.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를 헤매던 자연다큐멘터리 전문 최삼규 PD는 지금 탄자니아 마할레 국립공원에서 침팬지와 대화 중이다. 스타를 섭외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면 나비와 새가 사랑을 나누는 은밀한 장면을 촬영할 수 있다고 웃으며 말한 기억이 난다. 자연다큐멘터리 제작을 환경생명운동이라고 고백한 사람이다.

시사프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금요일밤 10시에 방송되는 KBS-1TV ‘이영돈 PD의 소비자 고발’은 웬만한 미니시리즈보다 시청률이 훨씬 높다. 황토팩에서 중금속이 나왔다는 사실은 KBS-2TV 월화 미니시리즈 ‘얼렁뚱땅 흥신소’에 예지원이 나온 것보다 더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다른 방송사의 월화 드라마를 살펴보더라도 ‘대장금’을 만든 PD가 만드는 드라마라고 해서 이병훈의 ‘이산’, 혹은 ‘용의 눈물’을 만든 PD가 연출한다고 해서 김재형의 ‘왕과 나’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브랜드를 내건 만큼 이영돈 PD의 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 드라마가 주지 못하는 전율을 매주 공급해야 하는 그에게 소비자 고발은 또 하나의 환경생명운동이 아닐까.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전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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