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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일본의 사과'이중 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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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 1984년 9월 6일. 한국의 국가원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의 첫 국빈방문에 일본은 여러 준비를 했다. 핵심은 두 나라의 과거사에 관한 언급이었다. 도착 당일 쇼와 일왕이 주재하는 궁중만찬회에서 쇼와 일왕은 준비한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금세기 한 시기에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정말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날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일본 총리의 오찬 연설도 마찬가지였다. "귀국 및 귀국 국민에 다대한 고난을 안겨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잘못에 대해 깊은 유감의 염을 간직함과 동시에…." '유감'이란 말만 있을 뿐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여질 표현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65년 한.일 협정을 맺을 때도 당시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은 36년간의 일제 식민통치에 대해 '사과'란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2. 이달 26일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조사 발표와 맞물려 유명환 주일대사가 일 외무성에 방문 타진을 했다. 조사 결과가 나온 만큼 일단 그 경과를 설명하고 유감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일 외무성은 바쁜 일정을 이유로 면담을 거부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27일 조간에서 일 외무성 관계자를 인용, "'한국의 공권력이 일본 국내에서 행사됐다고 하는 주권 침해가 있었음에도 한국 측으로부터 명확한 사죄도 없이 '유감'만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의견이 일 정부에서 강력히 제기됐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에 앞서 일 외무성은 24일 한국 정부에 공식 사과를 요청했다.

"너희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왜 우리에게만 사과를 요구하느냐"는 국수주의적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상한 것은 이중잣대가 아니냐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사과할 때는 축소지향적인 반면 사과를 요구할 때는 지나치게 확대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36년간의 주권 박탈과 동급의 사과를 요구해선 곤란하다. 사건 직후 김종필 당시 총리가 진사 사절로 가 유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다시 사과를 요구한다. '유감'이란 표현도 안 된다며 '사죄'를 하라고 한다.

잣대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원폭을 투하해 24만 명이 넘는 자국민 사망자를 초래한 미국에 대해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