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문자로 … ‘언어 너머 시’ ‘디카시’는 바람처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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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옥 시인이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화면을 보고 시상을 다듬고 있다. [사진=김상진 기자]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일몰(日沒)사진 한장. 그 옆에 ‘하루치의 슬픔 한덩이/붉게 떨어지면/짐승의 무거운 주둥이처럼/아무죄 없이/부끄러운 산(山)’이라고 적혀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이상옥(50·마산 창신대 문예창작과 교수)씨가 지어 자신의 휴대전화에 띄워 놓은 ‘낙조’란 제목의‘디카시(詩)’전문이다. 그가 이 시를 다른 시인들에게 휴대전화로 보내면 다른 시인들도 디카시를 보내온다.

이교수는 디카시를 새로운 장르로 뿌리내리도록 하기위해 26일 창신대에서 디카시 세미나를 연다. 이 세미나에서는 박찬일 시인이 ‘시와 소통’이라는 주제발표를 하고 양문규 시인이 토론자로 참여한다.

이 교수는 디카시 보급에 앞장서 왔다. 그는 2004년 4월 ‘인터넷 서재’(ww.member.kll.co.kr/lso/)란 사이트에 50여편의 디카시를 연재하면서 디카시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지난 5월에는 디카시의 개념과 이론을 소개한 평론집 ‘디카시를 말한다’(시와 에세이)를 펴냈다. 디카시집 ‘고성가도’(街道)와 디카시 전문지 ‘디카시 마니아’도 펴냈다. 디카시전시회와 디카시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이 교수는 “디카시는 단순히 시와 사진이 조합된 것이 아니라 사진을 문자로 번역해 놓은 ‘언어 너머 시’”라고 설명했다. 즉 디지털 카메라가 찍은 사진은 언어로 가공되기 이전의 ‘날시’(raw poem)로 볼 수 있고 이를 문자로 재현한 것이 디카시라는 것이다. 과거의 시는 시인이 주체였지만 디카시에서 시인은 번역자나 대리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아나로그 사진은 바로 볼 수 없지만 사물을 찍은 즉시 볼 수 있는 디카는 새로운 펜의 역할을 합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잡은 순간의 감동을 음미하면서 시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교수는 원로와 중견시인들에게도 디카시를 권유하고 있다. 원로 시조 시인 이상범(72)씨도 지난 5월 디카시집 ‘꽃에게 바치다’(토방)를 선보였고 강희근, 박노정, 이기철, 변종태 시인들도 디카시를 발표하고 있다.

디카시는 휴대전화, 인터넷을 통해 쉽게 유통되는 데다 사진이 있어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종이속에 갇혀 있는 기존 시와는 유통경로가 다르다.

이 교수는 “기존 시는 시인들도 어렵다고 한다. 좋은 시라고 해도 시인들 사이에 유명할 뿐이지 대중성이 없다. 많은 사람이 읽고 소통하지 않으면 시의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한때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같은 시집은 100만부나 팔렸지만 요즈음 유명한 시인도 1000권을 팔기가 어려운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예술은 끝 없이 영역을 확장합니다. 디카시는 극 사실성, 극 현장성, 극 서정성을 띠며 시의 본질인 즉흥성, 의외성, 순간성, 응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디지털 바람을 타고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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