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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해외 파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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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외국에 군대를 보낸 것은 통일신라시대 헌덕왕(재위 809~826년) 때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819년 신라는 당(唐) 헌종의 요청으로 운주(지금의 산둥성)에 갑병(甲兵) 3만 명을 보냈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알려진 이사도(李師道)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외세의 강압에 의한 해외 파병은 계속됐다. 『한민족 역대 파병사』에 따르면 고려·조선시대에 각각 세 번의 해외 파병이 있었다. 특히 원(元)의 주도로 추진된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은 막대한 국력 낭비를 초래했다. 그러면서 해외 파병에 대한 피해의식은 깊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그나마 ‘안보 외교’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였다. 광해군 때 명(明)은 동북아의 새로운 패권국 후금(後金·淸의 전신)을 치는 데 원병을 요구했다. 실용·중립 노선을 택한 광해군은 1618년 1만3000명을 출병시키면서 강홍립 장군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밀명을 내렸다. 반면 인조는 명분을 앞세운 친명 노선으로 돌아섰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었다.

베트남전쟁은 파병을 보는 인식의 지평을 바꿔놓았다. 반공(反共)이란 명분과 함께 한·미 동맹 강화, 베트남 특수라는 실리를 안겨 주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직·간접 경제효과를 총 50억 달러 선으로 추정한다. 1960∼70년대 경제 발전은 눈부셨다. 64년 103달러(북한은 153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73년 396달러로 뜀박질해 북한(348달러)을 추월했다. 지방도시에 흑백TV·라디오·재봉틀과 C-레이션(미군 야전전투식량)이 나돈 것도 그 무렵이다.

물론 희생도 적지 않았다. 한국군은 64년 9월부터 8년6개월 동안 연인원 32만 명이 참전해 5059명이 전사 또는 사망하고, 1만1000명이 부상했다. 고엽제 피해자는 지금도 고통에 떨고 있다. 국제사회 일각에선 ‘용병(傭兵)’이란 비아냥도 있었다.

그런 탓인지 해외 파병은 민감한 정치 이슈다. 65년 3월 통과된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은 야당의 거센 반대에 부닥쳐 여당 단독으로 처리됐다. 요즘 자이툰 부대 파병 연장을 놓고도 정치권은 맞서고 있다. 12월 대선을 앞둔 각 정파의 계산은 복잡하다. 한국은 이미 전 세계에서 경제력 13위, 군사력 8∼9위의 나라가 됐다. 반면 해외 파병 규모는 13개국, 1800명에 불과하다. 선진국이 될수록 지구촌 평화를 유지할 책임은 무거워진다. ‘글로벌 코리아’ 시대에 걸맞은 결론을 기대해 본다.

이양수 정치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