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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아! 햅쌀밥 한 그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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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김 폴폴 나는 밥을 고봉으로 담아서 언제나 맨손으로 매끈하게 마무리를 하셨습니다. 물론 꿀맛이었죠. 그 맛이 그리워사진으로나마 흉내를 내봤습니다. 너무 뜨거워서 그냥 들기조차 힘듭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어머니의 밥이 그리도 달았던 건 손맛 때문이었다는 것을.

윙윙 들판을 울리던 탈곡기 소리가 그치고 볏짚을 쌓은 짚가리가 여기 저기 생겨난다. 그래도 햅쌀밥을 바로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묵은 쌀로 지은 밥은 질고 밥알이 뭉개져 있는 데다 약간 시큼한 맛이 돈다. 고구마를 먹는 게 나을 것 같다.

 마당의 멍석 위에서 나락이 황금빛이 되어 간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맨발로 따뜻한 나락 위를 걷는다. 나락이 고루 잘 마르려면 고무래로 뒤집어 줘야 하는데 아이들은 일을 놀이로 만들어 발바닥으로 길을 내며 즐거워한다.

 며칠 말린 벼를 가마니에 담아서 우마차에 싣는다. 수매를 하러 가는 것이다. 입시를 치르러 간 식구를 걱정하는 것 같은 불안한 적막 속에 남은 벼는 광에 넣고 살찐 잉어 모양의 자물통을 채운다.

 오후가 되자 수매에서 일등급을 많이 받아 기분이 좋아진 할아버지가 돌아온다. 방앗간에 들러 도정한 쌀 한 자루와 신문지에 싼 쇠고기 두 근, 고등어 한 손이 우마차에 실려 있다. 부엌 아궁이에서는 짚이 타고 연기가 지붕 위에 남실거린다. 아궁이 불에 붉게 물든 얼굴로 어머니가 무쇠솥 뚜껑을 즈으윽 하고 열고 닫는 소리에 공명하여 아이들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다. 이윽고 부엌에서 김이 오른다. 냄새다, 밥 냄새.

 안방 두레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은 열 명 가까이 되는데도 조용하다. 할아버지만이 “밥상머리에서 다리를 떨지 마라”는 훈계를 잊지 않는다. 아무도 다리를 떨지 않는데도.

 할아버지의 상에는 아직 읍에서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대신 맏손자가 앉는다. 제일 먼저 그 상에 솥 안 밥 위에 얹어 익힌 계란찜이 놓인다. 아이들 모두 노리고 있는 반찬이다.

 밥그릇이 들어온다. 밥마다 기름이 잘잘 흐른다. 할아버지의 밥그릇만 뚜껑이 있고 제사 때 올리는 메처럼 밥이 그릇 위로 솟았다.

 “자, 먹자.” 할아버지의 식사개시 선언에 숟가락이 일제히 그릇으로 돌입한다. 뜨겁다. 김이 뜨겁고 밥이 뜨겁다. 후후 불고 나서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햅쌀밥은 묵은 쌀로 지은 밥과 달리 한톨 한톨 밥알이 살아 있다. 꺼내 보면 생김새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다. 후우 불고 다시 밥을 떠넣는다. 볼따구니가 저려 온다. 다른 소화기관들이 ‘야 너만 맛보지 말고 어서 씹어, 빨리 뒤로 넘기라구’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름이 둥둥 뜨는 쇠고깃국에 밥을 만다. 목구멍 아래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는 내장기관에 국물과 밥이 뒤섞여 모내기철 개울물처럼 내려간다. 식도가 화끈해진다. 배가 따뜻해진다. 반찬이 필요 없다. 밥이 반찬이다. 정수리에 땀이 솟는다. 이마에 열이 버쩍 난다. 후아후아, 입김 불어 대는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들판에 풍성하게 내리는 어둠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마을에 불이 하나 둘 켜지고 지상의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한다. 영길이도 아영이도 후후, 후후 밥을 먹고 있을 것이다. 뜨거운 밥. 햅쌀밥.

 “가반(加飯)하겠구나.” 할아버지가 그릇 윗부분의 밥만 덜어 먹은 밥그릇을 밀어 주고 숭늉을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일어선다. 할아버지가 가고 난 뒤 이리떼처럼 숟가락들이 덮쳐 온다. 아, 막아내야 하는데. 내 밥, 내 계란찜!

글=소설가 성석제, 그림=만화가 조주청
스타일리스트=이윤혜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소설가 성석제는 ‘음식’을 통해 ‘사람’을 길어 올리는 글 솜씨가 일품이다. 『소풍』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등의 작품을 보시라. “음식은 추억의 예술이며 오감이 총동원되는 총체예술”(『소풍』)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만화가 조주청은 여행가, 맛 칼럼니스트로도 유명하다. 『지구떠돌이 조주청 함께 뒹굴며 108 나라』 『고대 동·서양 교역로 실크로드』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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