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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급 문화재 3000여 점 '싹쓸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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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도난됐다 회수된 곽분양행락도와 제월당 송규렴의 교지(下). [사진=변선구 기자]

절도범 정모(60)씨와 장물아비 김모(44)씨는 7년 전 청송교도소에서 만나 문화재 절도단을 조직하기로 했다. 전국에 있는 문화재들이 허술하게 보관돼 있고 돈이 된다는 점에 착안했다. 출소 후 다른 절도범까지 규합한 이들은 전국의 향교.고택.박물관을 돌며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훔치기 시작했다. 골동품을 10년 이상 취급한 장물아비 김씨가 작품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선불금까지 주는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수사기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대포폰(차명 휴대전화)과 공중전화로만 연락했다. "잉어(문화재)가 올라가니 양주(100만원) 몇 병 준비해라"는 식으로 자기들만 아는 암호를 쓰기도 했다.

범행 수법은 치밀하고 대담했다. 목표로 삼은 곳을 사전답사한 뒤 침입.절도.판매로 서로 역할을 나눴다. 문화재를 보관한 수장고의 흙벽에 물을 축여 약하게 만든 뒤 파거나 망치로 쳐서 구멍을 내 들어가기도 했다. 경비견이 있으면 청산가리(시안화칼륨)를 묻힌 멸치를 먹여 죽였고, 금고는 통째로 들고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훔친 문화재 중 1000여 점을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버젓이 내놓고 팔기도 했다.

하지만 '장물로 의심되는 고문서가 유통된다'는 제보를 접수한 경찰이 1년간 추적을 벌인 끝에 꼬리가 잡혔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24일 박물관 등에서 보물급 문화재 3000여점을 훔쳐 장물시장에 팔아 넘긴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절도)로 정씨와 김모씨 등 6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또 훔친 작품을 팔아넘긴 김모(55)씨 등 장물아비 2명도 같은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추적 중이다.

경찰은 이들에게서 2100여 점의 문화재를 회수했다. 오원 장승업의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등 옛 그림들과 조선 후기 문신 제월당 송규렴, 옥오재 송상기의 교지 등 보물급 고문서 390여 점도 포함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도난 문화재 수나 범죄 횟수로 역대 최고 수준이며 회수한 문화재도 역대 최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잘 만들어진 조선 후기 2층짜리 농 하나도 그 값이 수백만원에 이르는데 이들이 훔친 문화재의 전체 가격은 어림잡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소정 변관식의 산수화(시가 3000만~4000만원 상당), 전북유형문화재 130호로 등재된 강응환 선생의 영정, 겸재 정선의 산수화 등 800여 점은 아직 회수되지 않았다. 광역수사대 지능1팀 강일구 팀장은 "유명 도난물품 20여 점에 대해서는 공개수배를 했다"며 "문화재가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소장가.애호가.골동품업계의 적극적인 신고와 협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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