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78. 뇌-침구학 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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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2002년 시드니에서 열린 호주 침구사회 심포지엄이 끝난 뒤 필자(앞줄 왼쪽에서 셋째)와 발표자들이 기념 촬영했다.

뇌와 침의 관계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당연히 뇌를 알아야 했다. 1997년 시판되고 있는 뇌 관련 교과서를 비롯, 전문 서적을 5000달러(약 500만원) 어치를 구입했다.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은 도서관을 뒤져 찾아냈다. 뇌 전공 서적들이 갑자기 내 연구실에 넘쳐났다.

“자 이제 뇌를 한번 파봅시다. 서로 다른 분야를 맡아 공부한 뒤 토론하도록 합시다.”

나는 의학을 전공하지 않아 인간의 뇌를 잘 몰랐다. 그러나 뇌와 침의 관계를 밝히는 데 필요한 뇌 지식은 몇 달만 파면 될 것 같았다. 그날부터 대학원생·포스닥(박사후 과정) 연구생들과 함께 뇌 전문 서적을 붙들고 살았다. 물론 뇌 신경 관련 세미나가 있으면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나는 ‘뇌-침구학’을 주제로 미국 국립의료원(NIH)에 연구비를 신청했다. NIH는 과학과 동양의학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려는 내 연구 주제를 본 뒤 30여 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96년 침 연구를 시작, 미국 과학원 회보에 논문을 발표할 때까지는 ‘침점’이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었다. 경혈이라고 하는 침점은 인체에 약 300곳이 있다. 예를 들어 새끼발가락 끝 부분에는 시각 관련 침점이 있다. 이곳에 침을 놓으면 뇌의 시각 관장 부분이 왕성하게 활동한다. 팔에 있는 외관혈은 귀를 치료할 때 침을 놓는 자리다. 여기에 침을 놓으면 대뇌에서 청각을 담당하는 부분이 활동하는 것을 fMRI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연구 결과가 98년 미국 과학원 회보에 실린 것이다.

NIH 지원으로 뇌와 침의 관계를 밝히는 연구를 본격화했다. 약 3~4년 동안 그 연구에 몰두, 침점이라는 게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통증의 경우 통증점이 여러 곳 있는데 그곳에 침을 놓으면 뇌가 반응을 보일 때도 있지만 없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때는 아무 곳에나 침을 놔도 통증이 가시기도 했다. 온 몸이 통증 경혈인 셈이다.

2003년께 나는 미국 양의침학회에서 그런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강연이 끝나자 침에 혹해 있던 양의들이 내게 몰려들어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꼭 침점이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게 또 한 번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98년에 발표된 내 논문이 한의사들의 침 효능을 과장 선전에 이용되는 일이 잦아진게 문제였다. 내가 연구 한 것이니 이를 바로 잡는 일도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뇌와 침 관련 논문을 처음 발표한 미국 과학원 회보에 종전 연구와는 다른 결과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 정정 논문을 지난해 실었다.

나는 과학이라는 것이 종교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틀린 것을 바로 잡아 나가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한의학도 틀린 것이 있거나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면 받아들여야 한다.

뇌와 침의 관계를 밝히려던 연구는 나를 또 다른 연구 방향으로 이끌었다. 뇌 영상에 관한 연구다. 21세기는 뇌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 연구를 할 기회가 내게 올 줄 몰랐다. 연구 인생 대부분을 인체 영상에 바친 내게 인체의 마지막 미지 세계인 뇌 영상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조장희<가천의과학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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