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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를찾아서>林語堂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근대 중국의 대표적 석학으로 꼽히는 林語堂(1895~1976)은 미국인 못지않게 영어를 잘 구사했고 조국보다 타국에서 더오래 살았지만 서구문화에 당당히 맞서 모국의 문화와 전통을 아끼고 자랑했던 중국인이었다.생전에 수필.소설.평 론등 20권이넘는 책을 남겼고 저널리스트.외교고문등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는 중국의 정신을 이어받은 탁월한 시인이었다.
1895년 중국 福建省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선교사들과의 접촉으로 일찍부터 영어를 익히게 된다.그는 上海의 세인트 존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과 독일의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 사를 얻은후 1923년 귀국하여 北京大에서 언어학을 가르친다.
조국에 돌아온 林語堂은 魯迅과 함께 신문학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봉건투쟁에 앞장섰고 중국어로 책도 펴냈으나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으로 하문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1927년에는 廣東국민정부 외교부 비서를 하다가 廣東정부가 없어지자 上海로 가서 중앙연구원에 들어간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점차 세력을 키워갈 무렵인 1932년 林語堂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로부터 순수문학을 옹호하기 위해 上海에서 『논어』라는 잡지를 발간한다.魯迅의 동생인 주작인,곽말약과함께 좌익작가를 반대하고 유머와 풍자,경쾌한 산문을 살려내려는이같은 노력은『인간세』『우주풍』의 잡지들로 이어졌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중도우파에 속했던 林語堂은 극우파로부터도 비난을 받았고 무엇보다 한때는 손잡고 신문학운동을 벌였던 魯迅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진보적 지식인 그룹이었던 魯迅은 좌파로 돌아섰고 항일운동을 펴야하는 시기에 유머나 풍자가 웬말이냐고 보수 진영의 林語堂을 비난했다.魯迅은 민중을 결집시키려 했고 林語堂은 좌파의 결집은 획일주의를 낳는다고 믿었다.
1935년까지 중국어로 책(『大荒集』『我的話』)을 냈고 上海영자지에 중국을 소개하는 풍자와 스케치,그리고 중국문명의 품격을 높인『내나라 내민족(My Country And My People)』을 연재하던 林語堂은 1■3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뉴욕의 영화회사 주재원으로 근무한다.1937년『생활의 발견』을써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쓴 중국동란기를 묘사한 영문소설『北京의 추억(A Moment in Peking)』 역시 베스트셀러가 된다.미국에서 중국어 잡지인『천풍』을 주간했고 유엔주재 대만 대표단 고문,싱가포르 남양대학 총장,자유중국 외교부 고문을 지내는등 그는타국에 있으면서도 중국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지금도 臺灣에는 그가 생전에 즐겨피우던 파이프등 유품을 전시한 林語堂 전시관이 있다.
1968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개발도상국의 행복과 긍지를 불어넣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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