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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22> ‘고종수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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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싸움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승부는 닥쳐올 단 한 번의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21일 울산 문수성에서 우리는 처절하게 부서졌다. 상대는 서두르지 않았으나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군이 허둥대다 놓쳐버린 중원을 교전 없이 접수했고, 두 번의 머리 놀림으로 승부를 끝냈다. 상대의 방어진은 강고했다. 그들은 길손처럼 흩어져 있다가 찰나의 순간에 자객처럼 스며들었다.

자전거를 타면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승부 세계에서도 이 준칙은 다르지 않다. 창단 후 첫 5연승과 드라마 같은 6강 진출은, 울산전 쓰라린 패배와 정확하게 상쇄됐다. 타인에 대한 평가도 이와 다르랴. 이를 악물고 오르막을 오를 때 사람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깔딱고개’를 넘어선 지금, 사람들은 ‘천재의 부활’이라고 쓴 펼침막을 펼친다. 그러므로 웃을 일도, 화낼 일도 아니다.

1년6개월을 허송하고 대전에 왔을 때, 사람들은 고종수가 아니라 고종수의 뱃살에 주목했다. ‘천재’와 ‘악동’이라는 수식어를 앞장세운 온갖 말(言)들이 대전시내를 말(馬)처럼 돌아다녔다. 키프로스 훈련에 가서 남들의 갑절을 뛰고 풀만 먹었다. 한 달간 곡기를 끊고 고기도 끊었다. 허리 둘레의 뱃살들이 풀리면서 다리를 받쳐야 할 근력들도 함께 데리고 나가 버렸다. 4월 복귀는 왼쪽 무릎이, 5월 복귀는 오른쪽 다리가 말렸다.

-종수야, 너도 이제 서른이다.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

백발로 변한 노스승(김호)이 홀연히 돌아왔다. 오랜 야인 생활로 그분의 그림자는 길고 수척했다. 그러나 눈빛은 깊고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 그가 마법의 피리를 부는 순간 잠자던 자줏빛 전사들이 깨어났다.

프리킥은 말 그대로 자유차기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프리킥을 찰 권리가 있는데, 고종수는 아직 근육의 굴신과 근력의 배분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서, 노스승은 이를 금하였다. 마지막 경기에서 한번 시도해 봤는데, 역시 마음은 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백 리를 가는 자는 구십 리로 반을 삼는 법’이라고 했다. 보여 준 것보다 보여 줄 게 많아서, 끝난 것은 끝난 게 아니다.

사랑이여, 적들이여. 새 풀이 돋는 새 봄, 고종수를 기다려라.

※『칼의 노래』 『자전거 여행』 『남한산성』을 쓴 김훈 선생의 글투와 일부 표현을 살짝 빌려 왔다. 후학의 치기(稚氣)를 해량하실 줄 믿으며.
 

정영재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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