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76. 미 학술원 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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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필자를 미국 학술원 회원으로 추천한 미 러커스대 쉡 교수(서 있는 사람). 그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 대학의 서열을 매기는 데는 여러 가지 지표가 있다. 그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미국 학술원 회원의 수가 가장 중요한 지표로 꼽힌다. 미국 남부의 상당수 대학들은 이 중 한가지에 해당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곳이 수두룩하다. 하버드 대학 같은 곳은 학술원의 회원 수가 200여 명이나 된다.

UC얼바인에는 2500명의 전체 교수 중 나를 포함하여 20명의 학술원 회원이 있었고, 내가 속한 의과대학 교수 600명 중에는 단 2명만이 회원이었다.

1997년 10월 내가 미국 학술원 정회원이 된 뒤 학교에 출근하자 학과에서 깜짝 파티를 열어줬다 .20여명의 교수들이 모여 다과를 준비해 나를 축하해줬다. 나를 보는 교수들의 눈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교수가 올라갈 수 있는 최상위 급수인 교수 8등급에 올라갔을 때만 해도 ‘좀 잘 나가는 교수’ 정도로 나를 바라보던 교수들이 학술원 정회원이 되자 ‘정말 뭐가 있긴 있었구먼’하는 눈치였다. 8등급 교수도 UC얼바인에 몇 십명밖에 되지 않는다.

깜짝 파티를 즐기면서도 머리 속 한 켠에는 이국에서 갖은 고생을 해가며 경쟁을 해야 했던 수십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웁살라대의 연수, 박사과정, 첫 직장인 스톡홀름대학, UCLA, 컬럼비아대학, KAIST 등에서 만났던 교수들이며, 제자들의 얼굴이 미국 학술원 회원증과 겹쳐 떠올랐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겠지만 지난 세월 그래도 놀고 오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UC얼바인의 학술원 회원 20명은 두 달에 한 번꼴로 총장과 간담회를 갖고, 학교 발전에 대한 자문을 한다. UC얼바인에서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인 셈이다. 그 자리에서 총장은 학교의 발전 구상을 발표한다. 총장뿐 아니라 대학이 이들을 최대한 예우해주는 게 관례로 자리를 잡고 있다.

미국 대학 사회가 남을 간섭하지는 않지만 업적에 따라 대접을 달리하는 것이 지금의 미국의 힘을 키우지 않았나 생각한다. 곧 경쟁 사회에서 승리한 사람한테는 그만큼의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UC얼바인이 미국 학술원 회원들에게 하는 그 같은 예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자리에서도 회원들은 서로 자기 분야의 연구 성과를 이야기하며 학문의 길을 넓히고 있었다. 97년 처음으로 이 모임 (Learned Society)에 갔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나이가 제일 젊은 사람 중에 하나였으나 그들이 자기 학문 분야를 설명하고 토의하는 모습은 감명적이었다.

내가 학술원 회원이 되기 전인 95년 중반께이다. 평소 내가 잘 알고 지내던 프레데릭 라인스 교수가 9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학술원 회원이기도 했다. 수상 전에 다른 일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라인스 교수는 내 전화를 모르는 사람이 건 전화처럼 냉랭하게 받았다. 속으로 학술원 회원인 데다 고참 교수이니까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나를 모르는 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으며 상당히 그 병이 깊어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노벨상을 받은 뒤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는 이처럼 남의 오해를 사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 같다.

조장희<가천의과학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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