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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75. 학문 동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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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해 뇌과학연구소를 방문한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리차드 언스트 스위스 공대 교수와 필자, 길재단 이철옥 고문, 이길여 회장(왼쪽부터)이 얘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 냇물에서 함께 멱 감던 벗이나 중·고교와 대학 친구들. 나와 그들과의 만남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있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놀러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경조사에도 찾아가지 않으니 그런 인연이 계속 될 리 없었다. 그래서 옛날 인연으로 만나는 친구나 선후배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학교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맥이 쌓였다. 서로 알아주고, 격려해주는 학문 동지들을 사귀게 된 것이다. 나와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전 세계 학자들과 학술지 또는 세미나를 통해 학맥의 동아줄을 더욱 굵게 만들었다. 그 사람들과는 지금도 수시로 연락하며, 필요하면 서로 심포지엄에 초청해 새로운 학문의 흐름을 교환하고 얼굴을 본다.

1974년 국제CT심포지엄에서 만난 미국 벨 연구소에 있던 쉡(현 러커스대학) 교수는 나를 미국 학술원에 추천해 정회원이 되게 했으며, 두달 전에는 중국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같이 참가했다. 그를 유명하게 했던 CT의 수학적 해법을 담은 컴퓨터프로그램을 내가 ‘쉡로간알고리즘’이라고 이름도 붙여줬다.

1991년에는 노벨 화학상을 받은 스위스 리차드 언스트 박사와도 가깝게 지내고 있다. 그는 고해상도 MRI의 수학 부분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았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뇌과학연구소의 도서관을 나는 ‘리차드 언스트 도서관’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 명명식에 그가 참석해 연구소 연구원들을 격려해줬다.

내가 그와 만난 것은 학술지를 통해서다. 그가 노벨상을 받기 10년 전인 1982년 국제전기전자학회 학술지(IEEE) 초청 논문을 내가 쓴적이 있다. 이 학술지는 25만명이 보는 세계 최대의 학술지이다. 주제는 ‘퓨리에 변환핵자기 공명단층촬영’이었다. 여기에 내가 언스트 박사의 연구 성과에 ‘KWE 메소드’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자신이 개발한 것이라도 쉽사리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내가 언스트 박사의 이론에 이름의 첫자 E와 Kumar 박사와 Welti (당시 논문 공저자) 박사의 첫자를 섞어서 지어준 것이다.

그로부터 14년 흘러 96년 내가 언스트 박사를 KAIST에 초청했다. 그때 처음 서로의 얼굴을 봤다. 물론 그 중간 중간 서로의 논문이나 특강 발표 때 상대방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나는 그가 노벨상을 탄 뒤 쉡 교수와 내가 공동으로 그를 미국 학술원에 추천해 회원이 되기도 했다.

일본에 세이지 오가와 박사는 fMRI 의 첫 개발자다. fMRI는 특별히 뇌의 어느 부위가 어떤 자극에 활동을 하는가를 영상으로 보는 MRI다. 그 역시 나와 쉡이 추천해 미국 학술원 회원이 됐다.

이들은 뇌과학연구소 개소식 심포지엄에 참석해 연구소 창립을 축하해줬었다. 학맥으로 연결된 사이에는 서로 부르면 가능한 한 최우선적으로 응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UC얼바인의 라이너스 교수, 일리노이대 로터버 교수, 터프츠대학 알랜 코맥 등은 그들이 생존해 있을 때, 아직도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컬럼비아대 에릭 리처드 칸델 등과는 자주 연락하면서 살고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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