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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수성'은 폐쇄적 … 있는 그대로 알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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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은 16일 한국학의 국제 허브 역할을 할 '국제한국학센터'가 다음달 문을 연다고 밝혔다. 센터장에는 조은수(철학) 교수가 내정됐다. 국제한국학센터는 한국학 연구기관을 두고 있는 하버드.스탠퍼드.예일.컬럼비아.UC버클리.UCLA.워싱턴(이상 미국).브리티시 컬럼비아(캐나다).빈(오스트리아) 등 해외 유명 9개 대학과 네트워크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학의 세계적 교류와 보급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계획이다.

센터 개관을 앞두고 '한국학의 1세대'로 불리는 마르티나 도이힐러(72.여.스위스) 전 런던대 교수를 비롯해 런던대 출신 셈 베르메르스(39.벨기에) 연구원, 독일 보쿰대에서 한국학을 전공한 안드레아스 뮐러(33.독일) 연구원, 재미동포 출신 유진박(39.한국) UC어바인 교수(사학과) 등 현재 규장각에서 연구 중인 '2세대' 한국학자 3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은 유창한 한국말로 "국가 위상에 비해 한국학과 한국어 브랜드 가치가 너무 작다"며 "정부가 전략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학의 현주소에 대해 말해 달라.

(도이힐러)"1967년,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 자리가 없어 연구를 위해 한국으로 건너온 경험이 있다. 70년대 하버드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학자가 12명이었지만, 단 한 명도 한국학계에 남지 못했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한국학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경제.정치적으로 한국의 중요성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유진박)"한국학은 작은 시장이다. 그러나 올해 미국 전임 조교수 채용 공고가 난 대학이 7~8개 된다."

(베르메르스)"도이힐러 선생님은 우리 세 명 모두가 태어나기 전에 학위를 받으셨다.(웃음) 미국은 사정이 좋아지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여전히 공부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럽이 통합되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지역 연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국학도 좋아질 것이다."

(뮐러)"유럽에서 한국학이 가장 활발한 곳이 독일이다. 3개 대학(베를린.함부르크.보쿰)이 전임 교수를 두고 있다."

-한국학 연구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이힐러)"한국학은 하나가 아니다. 역사.문화.언어.사회.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있다. 한국을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학 연구자를 중심으로 세계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결국 한국의 국제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유진박)"여러 학문이 있는데 그걸 합쳐 '한국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다분히 서양 중심적 시각이다. 그러나 한국학은 여전히 성장 단계에 있고, 그런 면에서 '한국학'은 한국을 알리고 발전시키는 데 유용한 도구다."

-한국학이 발전하는 데 걸림돌은 무엇인가.

(베르메르스)"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다. 런던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어 시험'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유럽 어디서든 '일본어 능력시험'과 '중국어 수준별 시험'을 볼 수 있다. 지역 연구의 출발은 언어다. 이 문제는 한국 정부 차원에서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한국학을 전공한 이후에 갈 곳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만약 친한 사람이 한국학을 하겠다고 물어 온다면 '20년은 기다려야 교수 자리가 날지 모르니 하지 말라'는 현실적인 답변을 줄지도 모르겠다."

(뮐러)"우리 모두 동양학이나 중국학을 공부하다, 전공을 한국학으로 돌린 학자들이다. 학부생들은 한국학을 접할 기회가 적다. 일본과 중국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물론 서양에서 일본과 중국에 대한 관심이 크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한국도 이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하버드에는 '하버드옌칭 라이브러리'가 있어, 중국학 연구자들이 중국에 직접 가지 않아도 고문을 보고 연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도이힐러 교수, 대담 중 갑자기 일어서더니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쳐들었다. 조선시대 선비 문화에 대한 자료를 정리한 책이었다. 책의 뒷부분에는 영문 소개가 쓰여져 있었다. 그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이것 좀 읽어 보라. 이런 엉터리 번역이 어디 있나. 한국학을 연구하려는 학생들에게는 영어로 된 자료가 중요하다. 그들에게 이런 번역문을 보여줄 것인가. 한국 기관과 정부는 반성해야 한다. 이것은 정부의 의지 문제다. 일본과 중국은 이런 번역문을 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베르메르스)"최근 규장각과 UC 버클리가 한국학 서적의 공동 출판을 위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작업은 한국학 연구에 대단히 중요하다. 권위 있는 기관이 번역하고, 명문대가 책임지고 출판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한국학의 위상을 높여줄 것이다."

(유진박)"학생들은 공부할 때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본다. 나는 원래 '중세 유럽 역사'에 관심이 있었지만 지도교수가 '지역 연구가 유망하다'고 조언해 진로를 바꾸었다. 정부나 서울대 같은 큰 대학은 한국학을 하나의 브랜드로 생각해야 한다. 앞서 지적했지만, 한국어 브랜드는 지나치게 평가절하돼 있다. 경제발전으로 인해 국가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한국에 관한 학문, 한국에 대한 문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정부나 기관들은 '브랜딩'에 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뮐러)"한국학 기관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원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 받은 인상과 바라는 점은.

(도이힐러)"매년 한국에 올 때마다 이곳저곳 돌아본다. 한국은 급격한 성장을 이뤘지만, 더불어 전통과의 단절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국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있다. 정작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베르메르스)"한국인은 따뜻하다. 늘 환대해 준다. 한국학 기관들이 좀 더 협력해 연구하길 바란다. "

(뮐러)"제일 놀라운 것은 속도다. 역동적이고 빠르다. 외국과의 학술 교류도 역동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유진박)"한국에 오면 지역 곳곳에서 '우리 문화 우수성 알리기' 행사를 한다. '문화 우수성'이라는 말은 폐쇄적으로 들릴 수 있다. 민족주의는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만, 한국은 그런 단계를 이미 지났다. 이젠 좀 더 열린 자세로 한국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세계에 알렸으면 좋겠다."

글=강인식, 사진=김성룡 기자

☞◆한국학=영어로는 'Korean Studies'로 표기한다. 역사.문학.언어.사회.경제.정치 등 한국에 대한 모든 학문을 포괄해서 지칭하는 말이다. 지역학에서 중국학.일본학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사용돼 왔다. 한국 관련 학문이 다양해지자 서양에서도 '한국학' 분야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는 1950년대부터 한국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193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 라이덴대에서 동양학과를 졸업한 뒤 67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취리히대(75년)와 영국 런던대(85년) 교수를 역임했다. 유럽한국학회의 창립 멤버인 그는 에드워드 와그너(전 하버드대 교수, 2001년 사망), 제임스 팔레(전 워싱턴대 교수, 2006년 사망)와 함께 서양의 3대 한국 사학자로 꼽힌다. 92년 그의 한국학 연구를 결산한 '한국의 유교적 변환'(하버드대 출판부)을 발간했다. 런던대 정년퇴임 후 취리히에서 조선사 연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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