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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정신이 집요한 탐구 열정 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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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마리오 카페키가 유타대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다.

올해 노벨상 의학상 공동 수상자로 확정된 마리오 카페키(70·미 솔트레이크시티 소재 유타대) 가 떠올리는 어릴 적 기억은 끔찍하다. 어머니가 나치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팸플릿을 돌리다가 독일 비밀 경찰인 게슈타포에 체포돼 끌려가는 장면이다. 1937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난 그가 고작 세 살 때의 일이다. 이탈리아 공군 장교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전사했다. 그는 졸지에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고아 신세가 됐다.

꼬마 카페키는 1년여 동안 어머니가 양육비와 함께 맡긴 이웃 주민과 살다가 맡긴 돈이 떨어지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집을 떠난다. 또래 부랑아들과 어울려 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먹을 것도 훔쳤다. 잠은 거리에서 또는 고아원에서 잤다. 유일한 목표는 주린 배를 채우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영양실조로 볼로냐의 한 병원에 수용됐지만 옷을 지급받지 못해 벌거벗은 채로 지냈고 하루 한 컵의 치커리 차와 빵 부스러기로 연명했다.

그의 인생은 독일이 패전하며 바뀌었다. 45년 정치범 수용소에 풀려나 카페키를 1년여 동안 찾아 헤맨 그의 어머니가 병원에 수용돼 있던 그를 찾아낸 것이다. 이후 카페키는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있는 외삼촌에게 건너갔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교육을 받게 된 그는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에서 초등학교 3학년 생활을 시작했다. 과학자인 외삼촌을 보며 자연스럽게 과학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고 한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심심찮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미국 언론에서 다뤄지곤 했다. 그가 과학자로서 최고 영예인 노벨상까지 타게 되자 미국 사회는 다시 한번 한 편의 영화 같은 그의 인생 역전을 크게 다루고 있다.

카페키는 대중 강연 때나 언론과의 인터뷰 때마다 “난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성공이 행운 덕분만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길거리에서 부랑아로 버티던 시절에 배운 헝그리 정신이 내 학문 연구의 열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끈기와 집요함을 길러 줬다”고 말한다. 80년 미 국립보건원(NIH)이 그의 유전자 연구를 “성공할 가능성이 작고 계속할 가치도 없다”며 지원을 거부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성과를 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로 확정된 직후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는 주제에 대해서도 성공 가능성이 보이면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연구를 계속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털어놨다. 그를 잘아는 사람들은 “카페키는 강인하고 주체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본인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목표는 성취하고야 만다”고 그의 의지와 성격을 말한다.

카페키는 자기 관리에도 철저한 인물이다. 자연과 함께 하면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 73년 하버드대에서 유타대로 직장까지 옮겼다. 6일 70세 생일을 맞았지만 요즘도 매일 산 속에 있는 집에서 학교까지의 1㎞가량의 산길을 걸어서 출퇴근한다. 조깅과 걷기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있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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