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독재자의종말>5.이디 아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독재자는 그 나름의 이념무장을 하는 것이 통례다.때로는 민족우월주의를,때로는 종교적 광기를, 일부는 인민민주주의를 독재의논리로 내세운다.
그러나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은 별다른 이념이나 논리적 뒷받침없이 무작정 독재의 칼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독특한 독재자로 꼽힌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政敵을 처단했으며 다른 부족 출신은 모두 잠재적 모반자로 간주,강권통치를 일삼았다.
굳이 그의 독재에 이름을 붙인다면 「흑인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英國식민지 시절 자신의 영국군 상관을 강제로자신앞에 무릎을 꿇게 해 우월감을 표시했다든지,美國을 방문했을때 당시 제럴드 포드 부통령에게 『당신들 백인의 정권을 당장 미국 흑인지도자들에게 넘기라』고 큰소리쳤던 戱畵 的인 모습으로만 남아있다.
아민의 독재는 총칼과 뿌리깊은 종족 분쟁으로 인해 가능했다.
식민지 영국군 하사출신이었던 아민은 62년 독립후 象牙를 몰래 외국에 내다팔고 무기를 사들이면서 군부에서 세력을 넓혔으며드디어 군의 정상인 참모총장이 된다.
소수 카콰族 출신인 아민은 참모총장이던 71년 초 밀턴 오보테대통령이 싱가포르를 방문한 틈을 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아민도 권력을 오직 자기 손아귀에만 간직했던 철저한 독재자였다. 우간다의 공용어인 영어를 쓰거나 읽을줄 모른 그는 모든 명령을 구두나 전화로 내렸다.그는 권력의 분배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대신 그는 카콰族 출신과 南수단人.누비아人에게 각각 헌병대와 사회안전부,그리고 비밀경찰을 나누어 맡겨 대부족인 바간다族을 탄압했다.
아민의 학살은 72년 내전이 시작되면서 자행됐다.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은 오보테측 우간다민족해방전선(UNLF)반군이 습격해오자 아민부대는 국경 부근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6개월만에 4만명 이상의 주민을 게릴라로 몰아 학살했다.유엔 인 권보고서는 아민이 집권했던 71~79년의 8년동안 우간다에서 50만명 이상이 학살당하거나 고문후 실종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아민은 경제도 폭력으로 다스렸다.영국 식민지시대에 우간다로 이주,부유층으로 자리잡은 인도.파키스탄 출신은 걸핏하면 비밀경찰로부터 얻어맞았으며 자립경제라는 미명아래 5만명이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됐다.
아민의 잔혹성은 그가 政敵의 人肉을 먹었다는 이야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법무.보사부장관 헨리 키엠바는 검시한 고위 공무원 시체가운데 상당수 시신의 일부가 잘려나가거나 손상당해 있었다고 폭로했다. 아민은 경제자립과 흑인 중심의 국가를 주장했으나 뒤를봐주던 蘇聯.리비아.케냐가 손을 떼자 UNLF의 끈질긴 공격에견디지 못하고 79년4월 맥없이 무너져 망명길에 올랐다.아민은한동안 망명처조차 구하지 못하다 유일하게 회교도인 그를 용납한사우디아라비아에 몸을 의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민의 집권 8년은 조국 우간다를 철저하게 피폐화시킨 기간이었다. 나일강 상류 고원지대로 한때 「아프리카의 眞珠」로 불리던 우간다의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그의 망명무렵엔 집권초기였던 70년대초에 비해 5분의 1수준인 1백달러 선으로 떨어졌다.그가 증폭시킨 부족간의 갈등도 깊은 상처를 남겨▲오보테정권(80~85년)▲티토 오켈로정권(85~86년1월)▲요웨리 무세베니정권(86년1월~)으로 이어지는 쿠데타의 악순환을 초래했으며 그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보복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부족갈등도 심화 한편 지금 이 시간에도 타국에서 구차한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아민의 말년은 독재자의 삶이 주는 비참함,그래서 때로 측은하기조차한 전형을 보이고 있다.
10명이 넘는 첩과 공식적으로 30명이 넘는 자녀를 식솔로 둔 그는 오늘도 사우디아라비아정부가 제공하는 호의에 마지막 희망을 건 채 살아있는 독재자의 化石으로 초라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李哲浩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