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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외무부한국전관련문서요약>1.전쟁발발과 휴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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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이 남침을 강행한 6월25일 이후 국제사회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이 불법이라고 규정하고38도선 이북으로 돌아가라고 결의했다.
한편 중국은 북한이 미국의 개입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우려를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아울러 周恩來는 만일 미군이 개입해 38도선을 넘어서게 된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겠다고 소련에 통보했다.
周恩來의 계획에 대해 스탈린은 7월5일 북경주재 소련대사에게보낸 전문에서 중국의 개입계획은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평가하고중국이 북한과 접경지역에 배치하는 9개사단을 항공대로 엄호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그러나 7월초 북한군이 大田을 넘어선 직후부터 미군이 개입됐고 전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9월16일 미군은 仁川상륙작전을 감행하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했다.
다급해진 金日成은 29일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내 소련군의 직접적인 개입이나 중공군의 개입이 시급하다고 파병을 간청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毛澤東에게 전문을 보내 중국이 하루빨리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毛는 스탈린의 요청에 대해 당분간 지켜봐야한다는 유보적인 답변을 보냈다.북한군이 당분간 유격전으로 전환하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첨부됐다.이후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 파병할지 여부를 두고 한동안 논란을 벌였다.
10월 중순 모 스크바를 방문한 周恩來는 스탈린이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조선파병 반대결의에 이의를 표명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毛澤東은 10월24일 중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야기할 미국의 한반도 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50년10월19일 鴨綠江을 넘어선 중공군의 개입으로 궤멸위기에 처했던 북한군이 다시 쳐내려오기 시작했다.중국과 접경지역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이 51년1월4일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전쟁은 밀고 밀리는 공방전에 접어든다.
스탈린은 51년3월3일 毛澤東에게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계획을통보하는 한편 북한에 소련군 2개 폭격항공사단과 트럭 6천대를공급했다.
51년 5월말 美蘇간에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이 시작되고 金日成은 7월16일 스탈린에게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원을해줄것을 요청하는 한편 정전협상의 조기타결을 위해 開城에서 회담을 적극 추진할 의사를 피력했다.스탈린은 金日 成의 제안을 모두 수용했다.소련 각료회의는 53년3월19일 폴란드가 제시한휴전안에 대한 毛澤東과 金日成 명의의 제의를 승인했다.
소련은 7월24일 휴전협정 서명에 金日成을 대신해 북한 부수상과 중국의 팽덕회가 참석토록 지시했다.
〈康英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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