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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 12년 … 제사도 지내 “아이들 교육에 미래 걸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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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올해 39세의 판티항.

시어머니 홍기연씨와 판티항이 인터넷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上). 판티항의 가족이 친정 방문에 맞춰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판티항은 맨 뒷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그 앞이 남편 이성견씨며 이씨 앞이 아들 도균이. 또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판티항의 어머니며 그 앞은 둘째 아들 우찬이다.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에 사는 베트남 출신 주부다. 1996년 취업 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와 친구 소개로 남편 이성견(44)씨를 만나 2년 뒤 결혼했다. 지금은 초등 2학년 도균(9)과 유치원생 우찬(6) 두 아들을 두었다. 최근 판티항의 집을 찾았다. 얼마전 일가족이 농협의 후원으로 베트남을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시어머니(69)와 판티항이 취재진을 맞았다. 작은 농가 앞엔 흰 방울토마토 같은 베트남 가지가 자라고 있었다. 시할머니(96)는 대장암에 치매 환자였다. 금요일 오전이라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등교한 뒤였다. 판티항이 이번에 베트남에서 찍은 작은 앨범을 내 놓았다. 이어 그는 작은 잔에 베트남 커피를 가져왔다. 아주 진했다. 판티항의 한국어 구사는 뛰어난 편이지만 알아 듣기가 쉽지 않았다.

 방에는 도균이의 일일계획표와 부족한 국어를 더 공부하자는 쪽지 등이 붙어 있었다. 방 한켠엔 베트남어 인터넷이 연결돼 있었다. 그가 틈나면 베트남과 안부를 주고 받는 창구다.

 판티항의 고향은 하노이에서 차로 8시간 걸리는 응우엔성 빌티비. 친정은 벼농사를 짓는다. 가족은 부모와 오빠 셋에 여동생 하나로 판티항은 둘째였다.

 이번 친정 나들이는 딱 1주일. 5년 만에 머나먼 친정을 찾는데 선물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판티항은 부모에겐 홍삼과 영지버섯을, 오빠와 여동생에겐 수삼을 준비하고 열두 명 조카에겐 용돈을 주었다. 가난한 시어머니는 베트남 사돈이 맛있어 한다는 참기름 한병을 보낸 게 전부다.

 동네 사람들이 판티항 이야기를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잔치가 벌어졌다. 친정 부모는 한국 사위가 왔다며 집에서 기르던 개와 닭에 송아지 한 마리까지 잡았다. 남편 이씨는 처남들과 40도짜리 술을 마셨다. 외갓집을 간 두 아이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사촌들과 금새 어울렸다. 25인승 자동차를 빌려 일가족이 모처럼 바닷가로 놀러갔다.

 베트남을 떠날 때 부모는 판티항에게 “어른들 잘 모시고 애들 잘 키우라”고 당부했다. 판티항은 그 말을 하면서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귀국할 때는 베트남 오징어와 인형·과자가 선물이었다.

 돌아보면 친정 어머니는 처음에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판티항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시아버지였다. 그를 소개 받은 시아버지가 며느리 감이다 싶었는지 무척 공을 들였다. 결혼한 뒤에도 시아버지는 막내 딸처럼 입덧할 때 맛있는 걸 사오는 등 세심하게 챙겼다. 그렇게 자상하던 시아버지는 6년전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판티항은 남편과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지만 지금도 한 가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이 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다. 술 때문에 새벽에 귀가하는 날도 잦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이번 처가 방문 때 남편은 “도와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한 사실이다.

 판티항은 사실상 이씨 집의 복덩이다. 시댁은 작년까지만 해도 사람 사는 집이 아니었다. 집안에 햇볕조차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구미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대표 장도유)가 시청에 긴급구호를 요청해 880만원을 들여 집을 수리했다. 그리고 잘 생긴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또 치매를 앓는 시조모를 수발하고 제사까지 배워 지낸다.

 판티항은 아이들 교육열이 유별나다. 그길 만이 가난을 벗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 베트남 친정 나들이도 아이들 학원 때문에 일주일만 잡았을 정도다. ‘보통’인 도균이의 성적을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송의호 기자

◆결혼이민자 가족 친정 방문 지원사업=경북도의 결혼이민자는 현재 3469가정. 경북도는 올해 판티항 등 53가족 200명의 친정 방문을 지원하고 있다. 여행 경비는 농협이 30가족 126명을, 대구은행이 23가족 74명 분을 후원했다. 지원 규모는 농협은 왕복항공권과 체제비(1가족 50만원)며, 대구은행은 1가족에 200만원이다. 방문은 연말까지 해당 가정이 편한 때를 택하도록 했다. 첫해인 올해는 결혼이민자 중 모범 가정을 꾸리며 5년 이상 친정을 못간 가정 중 장애인을 우선 선정했다. 이 사업을 추진 중인 경북도 조자근 가족정책담당은 “친정 방문사업이 결혼이민자 2세들에게 어머니의 나라를 사랑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같아 흐뭇하다”며 “내년에도 이 사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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