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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4번 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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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승엽 선수가 소속한 일본 프로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여러 면에서 독보적이다. 먼저 일 프로구단 중 가장 오래됐다. 올해가 창단 73주년이다. 상승(常勝)의 의지 표현으로 유일하게 ‘군(軍)’을 붙여 ‘거인군’이라 부른다. 1975년 처음으로 최하위로 전락하자 팬들이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 행진을 했을 정도로 열성 팬이 많다. 엄한 내부 규율로도 유명하다. 구단을 창설한 요미우리 신문사의 사주 쇼리키 마쓰타로의 “거인군은 항상 신사여야 한다”는 유언 때문이다. 그래서 선수가 TV에 출연하거나 지방 이동 시에는 원칙적으로 정장에 넥타이를 매게 돼 있다. 외국인 선수를 제외하곤 수염을 기르거나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것도 금지한다.

 무엇보다 ‘4번 타자’에 대한 집착이 유별나다. 한 번이라도 4번 타자에 오르면 ‘제대 거인군 4번 타자’란 기록을 남겨 공표하며 칭송한다. 그래서 요미우리의 4번은 ‘가문의 영광’이자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의 ‘꿈’이다.

 반면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 타순의 원칙이 없다. 선수 구성에 따라 최적이라고 생각되는 타순을 짠다. 4번 타자는 말 그대로 네 번째 타자일 뿐이다. 오히려 4번보다 3번 타자가 주포인 경우가 많다. 2003년 요미우리에서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마쓰이 히데키가 2004년 시즌에 4번 타자가 되자 일본 언론들은 ‘마쓰이 4번’이란 대문짝만 한 제목을 달고 난리가 났었다. 물론 미국에선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일본에서 4번 타자가 갖는 상징성은 엄청나다.

 일본, 특히 요미우리의 4번 자리란 영광인 동시에 중압감 그 자체다. 팬·동료들의 기대와 감시의 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웬만한 정신력 없인 버티기 힘들다. 역대 72명의 요미우리 4번 타자 중에는 나가시마 시게오(1460경기), 왕정치(1231경기)가 가장 오랫동안 4번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10게임도 채우지 못한 경우가 절반 가까운 33명이나 된다. 그 중 13명은 단 한 경기만에 4번 자리에서 물러났다. ‘70대 거인군 4번 타자’인 이승엽이 비록 지난해에 비해선 부진했지만 멋지게 4번으로 복귀, 막판 극적인 우승에 기여한 것은 그런 점에서 대단하다.

 야구와 정치의 세계는 다르겠지만 12월에 결정될 17대 대통령도 ‘대한민국 4번 타자’의 실력과 정신력을 겸비한 인물이기를 학수고대한다.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대형 홈런만 노리는 건 4번 타자감이 아니라는 전제를 달고 말이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