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씨의 소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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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02면

별 말 안 하고 그냥 앉아만 있어도 그날 모임을 훈훈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하면서 만난 이 가운데서 연출가인 김민기(56·극단 학전 대표)씨야말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분이었습니다. 신기한 건 기쁜 자리보다 슬픈 자리일 때 이 양반 참 값어치가 더 빛을 발한다는 거지요.

순화동 편지

문화계 인물의 초상집에 가면 똑 정물처럼 말석을 차지하고선 묵묵한 얼굴로 인사하는 그를 볼 수 있지요. 며칠 전 만났을 때도 우연한 자리였는데 지루할 뻔했던 행사가 그의 과묵하면서도 진중한 몸짓 한 번으로 환하게 피어나는 걸 봤다니까요.

그렇게 해서 몇 년 만에 김민기씨와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요새도 삶의 연료로 맥주를 쓰시느냐, 본디 전공(김민기씨는 서울대 미대를 나왔습니다)인 그림 작업은 언제 다시 시작하시느냐, 이런 대화 끝에 참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년에 어린이 연극 서너 편을 줄지어 무대에 올리겠다는 계획이었는데요. 좀 짓궂은 마음에 “아니, 동아시아 연극 전통을 아우른 세계적 작품을 내놓으시겠다는 꿈은 어디로 갔나요?” 여쭸더니 한마디로 자르시더군요. “창작이 최선은 아니죠. 우리 아이들이 더 소중하니까요.”

김민기씨의 ‘어린이극 우선론’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아이들과 청소년이 볼 연극이 없다는 거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본 연극 한 편이 일생 얼마나 큰 구실을 하느냐는 체험한 사람만이 압니다. 극단 학전이 내년 말께 역사적인 4000회 공연에 다다를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그 한 증거죠. 독일 극단 그립스(Grips Theater Berlin)의 ‘라인 1(Line1)’이 오리지널이지만 오히려 한국에 건너와 김민기의 손을 거치고 난 ‘지하철 1호선’은 한반도의 정서를 진하게 풍기며 젊은 관객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으니까요.

김민기씨는 “아이들을 위한 연극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내년 1월부터 학전 블루에서 ‘학전 어린이 무대’ 서너 편을 이어달리기 식으로 공연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2004년 이미 선보인 극단 그립스의 ‘우리는 친구다(원제 Max und Milli)’ 등 제대로 된 어린이극을 만들겠다는 거지요.

“한국에서 아동극이라 하면 주로 엉뚱한 환상의 세계나 무조건 웃기는 식이 많았죠. 그건 아니죠. 아이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극을 원해요. 그걸 보여줄 겁니다.”

“분명 적자일 텐데 협찬은 어떻게 받으시려고요?” 어리석고 무딘 기자 질문에 김민기씨는 예의 눈이 안 보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합니다. “나 미련한 거 알면서. 또 아파트 잡혀야죠 뭐.” 그러면서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지시더군요.

“극단 그립스의 초청으로 독일 베를린에 갔다가 배울 점을 발견했어요. 거기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미래를 위해 주정부가 큰 지원을 하더군요. 극단 그립스가 자체 공연을 보러 온 어린이 관객의 티켓을 주정부에 가져가면 관람료의 서너 배쯤 되는 돈을 보전해 주더라고요. ‘따따블’도 넘는 돈을요.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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