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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물갈이 앞서 제도개혁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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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당마다 공천과 새 인물 영입 작업이 한창이다. 특히 요즘 정치에 대한 불신감이 극도에 달해 기성 정치인을 물갈이하자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각 분야에서 그런대로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해온 인사들에 대한 정치권의 유혹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보도에 따르면 심지어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과학기술계에도 유혹의 손길이 뻗친다고 한다. 사실 그동안 국회는 이공계 출신에게는 불모지에 가까웠다. 16대 현역 국회의원 중 이공계 출신은 전체의 7%에도 못 미쳐 행정부보다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 게다가 행정부는 앞으로 고위공무원의 30%를 이공계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이라도 세웠지만, 이번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도 이공계 출신은 별로 우대를 못 받고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 듯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소외돼 있는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국회에 반영하는 통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극소수이지만 과학기술계 인사들에 대해서도 영입이 추진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국회에 들어가더라도 과연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 소위 전문가 대표로 국회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어떻게 현실 정치에서 소외되었고 결국 일회용으로 용도 폐기되었던가를 여러 번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정치권이 영입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과 이유를 살펴보면 이러한 우려가 기우(杞憂)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느 정당에서는 전도가 창창한 젊은 여성 과학자를 전국구 상위로 영입하려 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는 유능한 전문인력을 단순히 정당 이미지 개선을 위한 도구로 쓰겠다는 발상이다. 또한 행정부의 고위직을 고향이 맞는다는 이유로 징발하기도 하는데, 단지 그 지역에 기반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공천한다면 그 당 국회의원 숫자 하나를 늘리는 수단일 뿐인 것이다.

물론 국회의원이 된 후의 활동은 각자의 능력에 달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방송인으로 영입되었던 사람이 한 정당의 대표까지 되지 않았느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풍토와 제도하에서는 합법적인 활동만으로 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가기는 어렵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비밀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했던 김근태 의원의 선거자금 양심고백에서도 밝혀졌고, 지난번 대선에서 양측의 실무책임을 맡은 사람들 모두가 구속된 사실에서도 극명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이 같은 현실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전문가일지라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임기 내내 들러리나 서다가 끝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실제로 정치적 기반이 없는 비례대표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당한 기반을 가진 지역구 의원들도 오세훈 의원이 불출마 선언 후 토로한 대로 '일종의 액세서리 역할'로 만족해야 하는 일이 여태까지의 경험이었다.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 능력있는 전문가와 신인들로 한국 정치판을 새로 짜려면, 그들이 들어가서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여건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이러한 제도 개혁에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치권 내부의 문제도 있지만, 일반 시민들이 이루어야 하는 사회 전체적인 제도와 관행의 개혁도 있다. 예를 들어 돈이나 지연(地緣)에 얽매이지 않는 투표 행태를 확립하는 일은 유권자가 이루어야 할 가장 시급한 개혁일 것이다. 이와 함께 전문가 대표인 국회의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를 후원할 수 있는 든든한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다. 한 예로 과학기술계의 대표가 국회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국민에게 신뢰받고 정치적으로 독립된 과학기술인 집단이 있어야 할 것인데, 과연 지금의 과학기술 단체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필요한 제도 개혁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후보의 물갈이만 주장한다면 결실 없이 제자리만 맴돌다 말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