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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59. 첫 MRI 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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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83년 필자와 금성사가 공동으로 처음 상품화한 MRI.

1982년 9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야간 연구팀원이어서 한숨도 못 자고 실험하던 이상욱(현 서강대 교수) 학생이 뻐끔한 눈으로 내게 달려왔다.

“신호가 나왔습니다. 보십시오.”

MRI 영상을 받기 위한 첫 신호가 새벽에 나왔다며 내게 보여줬다. 그는 벅찬 기쁨을 억누르며 오전 8시까지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당시 대학원생들은 3교대로 24시간 내 연구실을 지키며 프로그램을 짜고 공부도 했다. 특히 MRI 장비를 설치한 뒤부터는 영상을 받기 위한 신호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상욱이 그 신호를 잡았다.

MRI에서 FID라는 신호만 나오면 그 다음은 술술 풀리게 돼있었다. 이를테면 MRI 가동의 물꼬가 터진 셈이다. 만약 그날 새벽 그 신호를 받지 못했으면 이상욱은 숙소로 돌아가 잠에 골아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밤을 새고도 그는 팔팔했다. 하루 종일 신바람이 나 있었다. 나 역시 그때의 기쁨을 말로 다하기 어렵다. CT와 PET의 첫 영상을 받았을 때의 기쁨과 다를 바 없었다.

첫 영상은 머리 부분을 3차원으로 찍은 것이었다. 세계 의료기업계와 국내 과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미국 GE, 독일 지멘스와 일본 업체 등이 수천억원을 쏟아 부으며 MRI를 개발하고 있었으나 상용제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열 명도 안 되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MRI 개발을 시작한 지 3년도 못 돼 영상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세계적인 의료기 업체들은 의료기기 시장 판도가 CT에서 MRI로 급속하게 바뀔 것으로 내다보고 치열한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의 연구 결과는 각 일간지에 대서 특필됐다.

금성사의 강인구 전무가 뛰어왔다. “아니, 한국에서도 이런 것을 개발할 수 있나요?” 그는 외국의 시사잡지며 의료기 업체들이 MRI의 가능성을 크게 다룬 것을 읽은 듯했다. 그러면서 금성사가 돈을 댈 테니 국산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과기처에서도 연구비를 대겠다고 나섰다. KAIST에서 색안경을 끼고 보던 교수들도 입을 꽉 다물었다.

지멘스·GE 등도 깜짝 놀랐다. 관심 밖이었던 가난한 한국에서 이런 첨단 과학의료장비를 개발할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지멘스는 내가 2년 전부터 MRI 기술 자문을 해 준 기업이다. 그때도 해마다 하루 이틀 가서 강연하는 조건으로 2만 달러의 자문료를 받았다.

 전국 수재들이 KAIST 대학원생으로 내 연구실에 몰려들었다. KAIST에 ‘스타 연구실’이 탄생한 것이다. 내 지도를 받는 대학원생이 많을 때는 30명에 달했다. KAIST 전기전자공학과 대학원생들은 대부분 제1 지망 연구실로 내 방을 신청했다.

 금성사와 공동으로 한 국산화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내 연구실로 파견된 금성사 연구진은 우리의 지도를 받아 MRI 기계를 생산했다. 83년 드디어 국산 MRI가 선보였다. 대당 가격은 12억원이나 했다. 금성사(나중에 금성통신으로 바뀜)는 국내에서 10여 대를 판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금성사가 외국에서 기술을 들여와 MRI를 개발하려고 나섰다면 엄청난 돈을 주고도 성공하지 못했을 수 있다. 외국 기업이나 연구소 등에서 그런 기술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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