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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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14) 터덜터덜 길남은언덕길을 내려왔다.멀리 바다가 무심하게 펼쳐져서 저녁을 맞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병원 앞에 서서 이시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내 꼴이 저 여자 눈에는 또 얼마나 가련해 보일 것인가. 고개를 돌리며 길남은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혼자라도 저 바다를 건너야 하나.곰곰 그런 생각을 길남은 한다.그래야 하겠지.여기 더는 남아 있을 생각이 아니니까.어떻게해서든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렇기는 하다만,처음부터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문득 아버지가 하곤 하던 말이 떠올라서 길남은 눈을 껌벅였다. 아버지가 늘 그러셨지,열 벙어리가 말을 해도 너는 가만히 있거라. 성질이 급한 걸 두고 늘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엎친데 덮친다고 태수 녀석은 무슨 속셈에서 그런 말을하는 걸까.내놓고 의논을 할 일도 못되는 그런 일을 가지고,앞을 막아서며 먼저 말을 꺼낸 태수의 마음을 길남은 곰곰 헤아려보았다. 그 녀석이 조심성이 보통이 아니라서 늘 말하지 않았던가.냉수도 불어 먹을 놈이라고.그런 그가 섣불리 말을 꺼냈을 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덥석,그래 우리 함께 가자 할 일은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길이 없으니 한 길을 걷는 거지.
물이 없으니 한 물을 먹는 거 아닌가.
달리 도리가 있다면 무슨 짓이든 못 하겠는가.
저 바다를 건너가야 목숨도 있고 세상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조선에 못 돌아가도 좋다.우선은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한다.
명국이 아저씨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길남은 그런 생각을해 본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정해져 있다면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그렇게 말하며 시작했던 일이다.
『서두른다고 될 일은 아니지.』 『그렇다고 미룬다고 될 일도아니지 않아요』 『급하다고 바늘 허리 매서 쓰랴? 때를 기다리자는 거 아니냐.』 그때가 언제라고 아저씨는 믿었던 것일까.바다에는 발도 못 담가보고 저꼴이 될 줄을 왜 몰랐던가.길남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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