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했던 그녀, 시각장애인 골프 출전 “희망의 샷 눈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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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경씨가 도우미 최규연씨의 조언에 따라 스윙을 하고 있다. [포천=정제원 기자]

“자, 여기 공이 있어요. 이 방향으로 공을 때리면 되는 거예요. 페어웨이 왼쪽은 OB 구역이니까 조심하세요.”

제1회 대신증권배 한국시각장애인 골프대회가 열린 1일 경기도 포천 베어크리크 골프장.

 양현경(38·여)씨는 코치 겸 캐디인 최규연(43·사업)씨의 말에 따라 힘차게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굿 샷”하는 함성과 함께 공은 100m 넘게 날아갔다.

양씨가 골프를 시작한 것은 올 1월. 함께 등산을 다니던 골프 칼럼니스트 김덕상(57)씨의 권유를 받고서였다.

“처음에는 중증 시각장애인인 제가 골프를 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

양씨가 시력을 잃은 것은 1992년. 결혼한 지 불과 6개월 만이었다. 이유도 없이 힘이 빠지고 궤양까지 생겼다. 피곤해 그러려니 했지만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병원을 찾은 양씨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베체트 병(behcets disease).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염증성 질환이다. 왼쪽 눈도 점차 기능이 떨어지더니 97년 양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삶에 의욕이 없었어요. 심한 운동도 하지 말라고 해서 집에서만 지냈지요. 그랬더니 점점 팔다리에 힘도 없어지고 성격도 폐쇄적으로 변했어요.”

그렇게 살다 골프를 만났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무작정 해보기로 했다. 때마침 설립된 한국시각장애인골프협회(KBGA) 자원봉사자인 최규연씨가 레슨을 해줬다.

 처음엔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갑자기 운동을 하니까 몸살을 앓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내심을 갖고 클럽을 휘둘렀고, 공이 맞기 시작하니까 손맛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맛보는 성취감이었다. 석 달 만에 코스에 나섰다.

“파 3홀만으로 구성된 9홀 코스였는데 아마 100타쯤 쳤을 걸요. 그래도 너무 좋았어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잔디 위를 걸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요.”

 이날 대회에는 세계시각장애인골프협회장인 데이비드 블라이스(호주)와 일본시각장애인골프협회의 미토마 노부히코 등 18명이 참가했다.

“골프는 시각장애인이 몸 성한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예요. 아직 여건이 좋지 않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이날 처음으로 18홀을 걸어 완주(?)한 양씨는 “골프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며 활짝 웃었다.

포천=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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