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m 영웅’이 마라톤 황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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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트랙의 신화’에서 ‘마라톤의 신화’로.

게브르셀라시에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결승선을 통과한 뒤 양손 엄지를 번쩍 들어 기뻐하고 있다. [베를린 AFP=연합뉴스]

 남자 육상 장거리에서 세계 정상으로 군림하다 2005년 마라톤으로 전향한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34·에티오피아)가 2년여 만에 마라톤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했다.

 게브르셀라시에는 30일(한국시간) 독일 베를린 시내 코스에서 열린 베를린 마라톤 풀 코스를 2시간4분26초에 주파, 2003년 9월 28일 폴 터갓(케냐)이 같은 대회에서 세웠던 종전 세계기록(2시간4분55초)을 29초 앞당겼다. 100m당 평균 17.7초로 42.195㎞를 달린 셈이다.

 레이스는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골인 시점 온도가 섭씨 16도일 정도로 선선했다. 여기에 평탄한 코스가 대기록 작성을 도왔다.

 게브르셀라시에는 골인 직후 현지 TV와 인터뷰에서 “바람이 약간 불었지만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말했다.

 스피드와 지구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러너임을 입증한 게브르셀라시에는 초반 10㎞ 구간 기록이 터갓의 기록보다 32초나 빨라 세계 최고 기록 수립을 예감했다. 중반 레이스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탄력을 붙여간 게브르셀라시에는 1시간2분29초에 반환점을 돌아 터갓의 기록을 30초 넘게 앞섰고, 최대 고비로 여겨지는 30㎞에서 다섯 명의 페이스 메이커 중 마지막 두 명이 떨어져 나갔지만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했다.

 게브르셀라시에는 출전료 25만 유로와 우승 상금 5만 유로, 기록 보너스 5만 유로 등 35만 유로(약 4억5500만원)를 한꺼번에 벌어들였다. 그가 결승선을 통과한 뒤 한참이 지나 아벨 키루이(케냐·2시간6분51초)가 2위로 골인했다.

 게브르셀라시에는 5000m와 1만m에서 무려 24차례나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며 ‘트랙의 신화’로 불려온 인물이다. 타고난 지구력과 스피드로 19세 때인 1992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5000m와 1만m를 휩쓸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이때부터 시작된 게브르셀라시에의 트랙 정복사는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페크(체코)를 뛰어넘을 만큼 화려했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연속 1만m를 제패했으며, 93년부터 99년까지 세계선수권 4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룩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후배 케네니사 베켈레(에티오피아)에게 금메달을 내준 뒤 마라톤으로 전향했고, 터갓의 세계기록을 깰 수 있는 유력한 철각으로 거론돼 왔다.

 풀 코스 데뷔 무대인 2005년 암스테르담 마라톤에서 2시간6분20초를 찍었고, 지난해 1월 미국 피닉스에서 하프마라톤(21.0975km)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면서 풀 코스 기록의 가능성을 키웠다. 그리고 9월 베를린 마라톤에서 2시간5분56초로 우승, 세계기록 경신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알렸다.

 게브르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 중부 아셀라에서 태어났다. 해발 2430m의 고원인 아셀라는 평지에서 뛰던 마라토너들조차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산소가 희박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그는 매일 10㎞ 떨어진 초·중학교를 달려서 등교하면서 지구력과 스피드를 키웠다.  

신동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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