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방북/겉은 신중… 속은 불편한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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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 평화공세에 이용당할 우려/핵해결 어떤 역할도 기대안해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남북한 동시 방문에 정부는 떨떠름한 기분을 감추지 않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이 카터의 역할에 대해 『개인자격으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라든지 『그에게 의전상 필요한대로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 등을 해 정부가 카터의 방북을 보는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같은 정부의 분위기는 대통령의 카터 방북에 대한 시각에서 비롯되고 있다.
피터 타노프 미 국무차관이 11일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김영삼대통령은 『민감한 시기에 그의 북한방문이 김일성에게 악용될 수 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정부의 이같은 반응은 우선 그의 남북한 방문이 매우 민감한 시기에 이루어지는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
정부관리들은 제재가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방북은 북한으로 하여금 정부와 국제사회의 의도를 오판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말한다.
또 북한이 제재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공세를 펴는데 카터가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정부는 처음 카터의 남북한 방문에 『그를 통해 북한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긍정적인 진전을 가져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갈루치 차관보)는 기대를 밝히고 있다.
카터의 방북을 보는 시각에는 한미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미국은 어떤 수단이건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면 기대볼 수 있다는 자세로 카터의 방북을 보는 반면 한국은 제재라는 수순에 변화를 줄지 우려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같은 태도에 대해 일부에선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 카터의 중재를 먼저 제기한 때문이란 분석도 한다.
이 시각은 정부가 그간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인 노력과 고민을 보면 어떠한 움직임도 활용할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데도 이처럼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은 정치적 이유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당국자는 『카터의 남북한 방문문제는 지난 91년부터 움직임이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신중하게 대응하는 것을 김대중씨와 연결지어 해석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강조하며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당국자는 카터에게 어떤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분명히 함으로써 정부내 카터 방북에 대해 불편해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음을 시사했다.<강영진기자>
◎여권­김대중씨 미묘한 신경전/동교동 “절대 카터 안만난다”/국내 정치와 연결해석에 불쾌
지난 10일 아침 레이니 주한 미 대사가 전격적으로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했다.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문제와 관련한 사항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레이니 대사의 전화통화로 이루어진 이날 회동의 정확한 대화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김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나에게 신경쓰지 말라. 우리 정부와 상의해 편리한대로 하면 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익명을 요구한 아태평화재단측 핵심 관계자가 밝혔다.
아태평화재단측은 일요일인 12일 『김 이사장이 카터의 방북전은 물론 후에도 만나지 않는다. 카터와 만날 경우 정부와 입장을 어렵게 만들뿐만 아니라 대북한 문제의 창구는 정부로 단일화돼야 한다는 김 이사장의 지론에도 맞지 않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카터를 만나지 않기로 한 속사정은 이런 공식적인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
카터의 방북문제를 놓고 김 이사장과 정부·여당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단측 관계자와 김 이사장의 오랜 측근들은 이에 대해 『여권 전체에서 카터의 방북에 대해 일제히 비난조의 발언이 나오고,김 이사장의 행보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화갑의원(신안)은 『정부·여당은 미국의 밀사격인 카터의 방북문제를 국내 정치의 이해득실을 개입시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비난했다.
김 이사장측은 카터의 방북이 북한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만큼 카터를 만나서 공연히 구설수에 오를 이유가 없다는 판단도 있는 듯하다.
김 이사장은 북한이 유엔제재 등 막바지에 몰린 만큼 마지막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성과는 김 이사장이 앞에 나서지 않아도 알아줄 사람은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레이니 대사도 김 이사장을 방문했을 때 한국정부에서 카터의 방북을 꺼려하는 문제점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이사장이 최근들어 자신의 「전공분야」로 내세우던 북한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발언을 삼가고 있는 것은 핵문제의 추이를 좀더 지켜보겠다는 판단도 작용했지만 이러한 국내적인 잡음도 계산된 것 같다.<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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