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유창혁(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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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94년 6월7일 한국 바둑사의 중요한 새 장을 기록하는 첫 페이지가 될는지 모른다.
유창혁 6단의 왕위 3연패­. 이는 단순히 유왕위가 타이틀을 지켰다는 사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무적으로 국내 중요 타이틀을 석권해온 이창호에게 마침내 제동이 걸리고 한국 기계가 다시 정상의 라이벌간에 혈전을 거쳐 또한번의 도약을 이룩할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랭킹 1위 왕위까지 이창호가 차지했더라면 사실상 국내기계를 평정했다는 뜻이 된다. 다시말해 이 시대 한국바둑은 이창호로서 한계에 도달하고 또다른 천재가 나올 때까지는 이창호 수준과 그 이하에서 맴돌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을 유창혁이 저지했다. 이로써 유와 이는 다시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결판날 때까지 불꽃튀는 접전을 계속 벌일 수 밖에 없고,그 과정에서 한국바둑의 지평은 더욱 멀리 더욱 넓게 열릴 것이다. 이번 유왕위의 타이틀 방어에 유달리 갈채가 쏟아진 것도 이런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바둑의 승부는 운명과는 다르다. 트로이전쟁의 두 영웅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맞붙었을 때 땅위의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승부에 애태웠지만 하늘의 제우스신은 두 사람을 운명의 저울에 올려놓고 이미 헥토르의 패배를 결정하고 있었다. 바둑은 이와는 다르다. 승부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두는 사람의 뼈를 깎는 노력과 불꽃같은 투혼,섬광같은 감각에 의해 승리를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유왕위는 1백70㎝ 키에 55㎏ 체중을 가진 28세의 청년이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소년같은 동안이지만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 일곱살때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워 10급 수준이었는데 신문기전의 대국보를 외워보라는,바둑도 모르는 어머니의 훈수로 국민학교 3학년때 「어린이국수」가 됐다.
바둑평론가 박치문씨에 따르면 유왕위는 그 날렵한 몸매나 예쁘장한 얼굴로 인해 『의적 일지매』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이제 일지매 유왕위의 이번 승리로 한국바둑의 지평은 더욱 넓게 열리고 한국바둑의 세계 제패가 더욱 확고부동해질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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