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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후다, 화투, 그리고 이완용…48장 ‘동양화의 내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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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화투는 16세기 일본 규슈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건넨 카르타(carta)에 기원을 두고 있다. 카르타는 왜색화하면서 하나후다(花札) 또는 하나 카르타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조선통신사가 전한 수투(數鬪)도 일정하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화투 그림은 붓으로 그린 게 아니라 에도(江戶)시대에 널리 유행한 우키요에(浮世繪) 판화로 찍어낸 것이다.

화투의 12달은 일본의 4계를 초목 문양을 중심으로 반영하고 있다. 1월 송학과 2월 매조는 따뜻한 일본 날씨에 피는 매화와 텃새 꾀꼬리를, 3월 사쿠라(벚꽃)는 더 설명할 것도 없다. 4월은 흑싸리라고 부르나 정작 등나무이고, 5월 난초는 붓꽃, 6월 모란에는 나비가 날고 있다. 한국에서는 선덕여왕 고사에서 알고 있듯 향기 없는 꽃 모란에 나비를 그리지 않는다.

7월 홍싸리에 멧돼지는 일본에서 사냥철을 뜻하고, 8월 공산명월은 일본 명절 월견자(月見子)를, 9월 국화는 서리에도 지지 않는 기상이 아니라 무병장수를 기려 국화술을 담가 먹는 풍습을 담고 있다. 10월 단풍은 ‘낮 홍엽, 밤 홍등’ 풍습에 사슴 사냥철을 알리고, 11월 오동은 본디 일본에서 12월로 덴노의 도포 문양이고, 12월 비에 나오는 갓 쓴 이는 10세기 일본 서예가 오노도후와 설화(개구리가 버드나무에 뛰어오르는 걸 보고 힘써 사는 이치를 깨달았다는)를 담고 있다.
이에 맞서 겨레의 정기를 새롭게 하겠다는 의지로 ‘한투’가 나오기도 했으나 역부족인 듯하다.

하나후타가 조선에 건너온 건 대개 갑오년(1894)으로 보고 있다. 동학농민투쟁과 그 좌절에 이어 일제가 실질적 한반도를 장악해 가던 때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왜인들이 서울과 항구들에 화투국을 설치하면서 신사와 상인들이 파산하는 경우가 많고, 일본인들이 기교로 이목을 현란하게 부려 도성에는 절도가 많다고 했다. 전문 타짜(打者)들이 건너왔음 직하다. 일찍부터 일본에는 이러한 전통이 강했다. 야쿠자란 본시 에도 정부 아래서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막부나 번의 공사판에서 일꾼들이 받아간 품삯을 노름으로 되찾아와 바치는 구실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 대가로 자기 구역에서 ‘삥뜯기’를 용인받았다.

이 하나후타는 매국노 이완용에게는 제법 약이 되었던 모양이다. 근육이 당기고 쑤시는 견인증을 앓았던 이완용은 통증을 잊고자 화투를 가까이했다. 그가 화투명인 첫 번째 이름으로 등극하고 있는 게 그저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을사오적’들은 두루 화투를 즐겼다. 나라를 팔아먹던 일에 비기면 뻐근한 긴장감은 자못 미치지 못했을 터이다. 그에 버금가는 망실 황족 이지용이 화투 중독으로 신세를 조지는 것도 화투 내력에 심각한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실로 우리네 화투 이력은 을씨년스럽다 하겠다. ‘을씨년스럽다’는 말 자체가 ‘을사년스럽다’에서 비롯되었으니 딱하지 않을 리 없다.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에 도박을 엄히 단속했다. 식민지배의 윤리성을 외형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이자 조선 민중의 일상과 욕망을 통제하는 주요한 무기였던 것이다. 아울러 식민지 수탈체제 내에서 자칫 방임할 수 있는 노동통제를 틀어쥐는 일이기도 했다. 이들은 화투는 못하게 하면서 화투를 만들어 파는 일에는 세금을 물렸다. 세계공황이 찾아오자 골패세령(1931)을 발동하고, 마작판(1932년, 종로 내 60여 개 마작구락부) 등에서 나오는 도박 수익으로 부족한 식민지 재정을 메워나갔다.

참고로 한국 복권의 근대적 ‘효시’라고 할 ‘승찰(勝札)’ 또한 45년 4월 일제가 조선사람 주머니를 털어내 전쟁자금을 마련코자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서구식 경마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마사회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마사회를 이은 것이다. 54년에 뚝섬경마장이 들어서기 전 서울경마장에서 이미 ‘맛뚜기’를 비롯한 도박이 버젓이 성행했다.

빠찡꼬는 5·16 직후 김종필 주도로 500여 대(혹은 2000여 대)를 들여와 증권·워커힐·새나라자동차와 함께 공화당의 창당자금화했다는 의혹을 받은 뒤 몇 가지 경로를 거쳐 민간업자에게 이전되었다. 한국 도박계는 일본으로부터 좀처럼 자유워지기 어려운 내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화투로 굳건히 자리잡은 하나후다가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다시 한반도 노름판을 장악하게 된 데는 그만한 연고가 있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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