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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의 맨발 갯벌 나들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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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김장훈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작가모집 면접시험을 앞두고 모 방송국 대기실에서 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그 옆에서 나만큼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키다리 총각.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몇 차례 캑캑대더니 “죄송하지만 소리 좀 질러도 될까요?” 묻는 폼이 정말이지 뜬금없었다. 허락하는 대꾸가 떨어지자 기를 쓰고 고함을 질러대는데 지금도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 둘 다 엄한 대기실에 앉아 있었음을 알아챘을 땐 면접시험이 다 끝난 후였다(그때는 휴대 전화기보다 ‘호출기’가 유행이었는데 알뜰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것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방송국 밥을 먹게 된 후, 가끔 마주치는 김장훈의 맨발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약간 작아 보이는 양복에 커다란 구두 그리고 맨발. 아무리 봐도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옷차림이었다. 언제고 꼭 한 번 맨발의 이유를 물어봐야지 싶었지만 교양국과 예능국간의 거리는 가깝고도 멀어서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1998년 김장훈의 4집 앨범 <나와 같다면>이 크게 히트를 쳤고, 빅 스타가 돼버린 그와 사적으로 맞대면을 하기란 더더욱 먼 얘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멀리서나마 그와 마주치는 일은 종종 생겼다. 전생에 못 받은 돈이라도 있는 건지 그가 다녀간 자리에 이유도 없이 불쑥불쑥 내가 서 있는 거다. 이를테면 보육원 같은 시설이라든지 재야에서 노니는 문인들의 집 등 어쩐지 스타급 가수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장소에서 맞닥뜨리곤 했다.
그의 남다른 선행이 널리 알려진 지금에 와서 보니 보육원 출현은 별로 놀라울 것이 없지만, 인적 드문 강원도 산골짜기 어느 문인의 집 부엌에서 쪼그려 앉아 밥을 나눠먹으면 말이 달라진다. 그저 밥 해주는 아줌마려니 생각하면서도 소탈하고 깍듯한 모습으로 선한 인상을 풍겼던 김장훈. 때는 이 때다 싶어 “왜 항상 양말을 신지 않느냐?” 물어봤다. “벗으면 시원하잖아요” 웃으며 말끝을 흐리는 걸 응시했더니 ‘밥 아줌마’ 맘 상할세라 이런 저런 얘기들을 소상히 들려준다.
“몸과 마음이 시원해지면 노래도 더 잘 되고, 영혼이 가벼워지는 걸 느껴요. 내 노래를 듣기 위해 돈과 시간을 써가며 공연장까지 찾아주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시간을 안겨주고 싶거든요. 우리끼린 콘서트를 ‘낭만계(契)’라고 불러요. 낭만적이고 행복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또 시간을 내서 계를 하러 공연장을 찾고, 얼마나 좋아요? 사람들이 모두 일어선 채로 열광하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놀 때 무대에 선 보람을 느끼게 되죠.”
숙연해진 음성으로 자신의 관객들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던 김장훈. 워크홀릭 기자 역시 그의 팬들을 떠올리며 ‘스탠딩 공연도 꽤 훌륭한 워킹 다이어트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 만남이 있은 후 머지않아 김장훈의 선행 사례가 약속이라도 한 듯 언론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사방에서 칭찬이 봇물 터지듯 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얼마나 쑥스럽고 불편할까 내심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도 했다. 요즘 같은 홍보 시대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곧장 알게 하라’고 했던가? 좋은 일일수록 소문을 내고 홍보를 해야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갖는 후원자들이 더 많아진다는 말씀.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들을 감수키로 한 김장훈, 보육원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모습이 그대로 공중파에 공개됐다. 시간을 쪼개서라도 아이들과 더 많이 뛰어놀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그가 더 욕심내고 싶은 것은 “스케줄에 쫓기지 않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달이 후원금만 1천만 원 이상 모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있을 턱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 공연장이며 방송국, 보육원, 강원도 골짜기 등등을 모두 찾아다니려면 잠 잘 시간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해피홈 봉사단체에서 ‘김장훈의 맨발 나들이’ 소식이 들려왔다. 모 회사의 후원을 받아 많은 아이들과 함께 갯벌체험을 떠난다는 희소식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부쩍 외로움을 탈 어린이들과 제대로 한 번 놀아보려는 심산인 듯했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소풍이라기에 덩치 큰 소녀로 가장하여 김장훈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건만 제 아무리 극비리라도 언론에서 이를 놓칠 리 있겠는가. 역시나 덩치 큰 소년으로 가장한 몇몇 방송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 만난 고기마냥 갯벌에 뛰어드는 김장훈과 아이들. 그 간 실컷 뛰어놀지 못한 한이라도 푸는 양 정신없이 놀기 시작한다. 키다리 아저씨의 애틋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천사들, 가수 아저씨를 갯벌 위로 넘어뜨리는 장난이 그렇게나 재밌는 모양이다. 조금만 신경을 써줘도 이토록 해맑게 웃는 아이들인데, 공연 수익금 전부를 준다 한들 아까움이 있겠는가.
‘낭만계’에서 나온 수익금을 작은 천사들의 통장으로 주저 없이 넘겨버리곤 그놈의 포장마차 타령(호구지책이 걱정되면 포장마차라도 차리면 될 것 아니냐는 김장훈의 변)을 또 시작하는 김장훈. 이 사람의 범상치 않은 맨발 정신이 앞으로도 쭉 승승장구하길 바란다.

설은영 객원기자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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