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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처 공무원들 “일할맛 안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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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허울뿐인 위원회/각종교육의 홍수/생색용 과제선정/정책보다는 전시용 행사위주/은행 임직원들도 잇단 특강에 “신물”
경제 정책이 무슨 위원회나 행사,과제 선정 등에 치우쳐 정책보다는 행사 위주로 흐르고 있다. 실질적으로 일을 하기 보다는 모여서 식사를 한뒤 「잘 하자」는 정도의 구호를 외치거나 생색용 과제를 선정해 그럴 듯한 도상연습식의 서류작업(Paper Work)에 머무르는 경우가 새 정부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것이 관가나 산하기관·업계와 공통된 지적이다.
◇이름뿐인 위원회=국제화가 강조되면서 국무총리 산하에 국제화 추진위원회,기획원 밑에 경제국제화 기획단이 있는데 상공자원부도 지난달 기업 세계화기획단을 만드는 등 비슷한 성격의 위원회가 잇따라 생겨났다. 상공자원부 관계자는 수시로 구성되는 민관 위원회가 「주무국의 소관」이어서 대충 1백개를 넘어서리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집계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행사=전국의 35개 은행장들은 20일(금요일) 오후 4시부터 이튿날 오전까지 은행연합회가 주관하는 연찬회에 참석해야 한다. 첫날은 금융인의 사명,은행산업의 경쟁력 강화방안 등과 관련된 특강과 함께 그룹별 토의를 갖고 이튿날에는 현대인의 건강관리,선진사회가 요구하는 지도자상에 대한 강의까지 들어야 한다.
오는 28일(토요일) 과천 경제부처의 장관을 포함한 국장급 이상 간부 2백80여명은 하루종일 종합청사 지하강당에서 경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과제 선정=경제기획원은 이달초 국제화 관련 12개 과제를 선정해 연말까지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기획원·재무부·상공자원부 등 관계자들은 대부분 연말까지 작업을 해야 할 판인데,상당부분이 이미 신경제 5개년계획에 들어가 있어 중복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총리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40개 국제화 과제를 정해 곧 관련 부처에 시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양재찬·심상복·이철호기자>
◎상공부 과장의 사표낸 속사정/“공무원생활에 흥미잃어” 회계사 개업
정만원씨(42)는 바로 며칠전까지 상공자원부의 과장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했던 대학 4학년 때 공인회계사자격부터 딴 뒤 행정고시에도 응시,지난 80년 4월 동력자원부 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최근에는 구주통상과장으로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씨는 그러나 이제 더이상 과천정부청사로 출근하지 않는다. 며칠전 사표를 던지고 공인회계사 사무실을 열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동력자원부에서 일할 때부터 엘리트라는 소리를 들어왔던 그는 『공무원 생활에 흥비를 잃었다』고 시큰둥하게 말한다.
정씨는 최근 수사기관에 몇번 불려간 일이 있었다.
대전 엑스포조직위원회 간부들과 상공자원부의 사무관 등이 최근 비리사건으로 줄줄이 구속되면서 초기에 잠시 엑스포에 관계했던 정씨도 함께 조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수사결과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정작 일이 생긴 것은 정씨 자신이었다.
갑자기 공직생활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염증을 느낀 것이다.
같은 상공자원부의 김현태 인사계장은 요즘 15년 이상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들의 은근한 부탁이 전에 비해 갑자기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하반기로 예정된 특허청 조직확대 때 쉽게 옮겨갈 수 있도록 신경 좀 써달라는 부탁들이다.
『엘리트 의식과 프라이드로 뭉쳐있던 중앙경제부처 공무원상은 이제 옛말입니다.』
몇년째 과장승진을 기다리고 있는 재무부 어느 고참 사무관의 말이다.<이철호기자>
◎농수산부 사무관 문책 뒷얘기/열심히 뛴 댓가가 농안법 파동 “속죄양”
농안법 파동이 진행되는 동안 농림수산부의 조부관사무관은 과천관가에서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문제의 농안법과 도매시장을 담당하는 농산물유통국 시장과에 근무중이던 그는 지난 7일 농안법 파동의 책임을 지고 직속 상관인 신순우 농산물유통국장,전임 시장과장이던 김주수 기획예산담당관과 함께 직위해제됐다.
이 문책인사는 과천관가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특히 조 사무관의 문책은 아무리 「속죄양」이 필요한 상황이라해도 『너무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행시 34회로 올해 30세인 조 사무관은 지난해 8월 시장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유통국장 등이 법무담당관실에 근무하던 그를 스카우트했었던 것이 이번 문책의 화근이 될 줄을 당시에는 몰랐다. 더구나 그 때는 이미 농안법이 개정된 후였다. 조사무관은 직원 한명을 데리고 중매인 달래랴,도매시장 확충하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불과 9개월사이에 그는 부내에서 농안법과 유통문제에 가장 정통한 직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런 열성과 능력이 결국은 그의 앞날에 엄청난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직위해제로 이어진 것이다.
조 사무관의 「사연」에 접한 과천의 수많은 사무관들은 『산더미같은 업무에 비해 사무관들이 무슨 권한이 있는가.
이런 식으로 열심히 일한 사무관이 책임까지 져야한다면 정말 복지부동하는 수 밖에 없다』고 내뱉고 있다.<손병수기자>
◎기획원과장 IMF 지원이유/승진길 막막… 후배들에게도 인사숨통
경제기획원의 과장 K씨는 같은 직장의 사무관 L씨와 나란히 지난 9∼11일 실시된 국제통화기금(IMF) 직원선발 면접시험에 응시했다.
IMF직원이 되면 본부가 있는 워싱턴에서 2년간 파견근무(연구·조사 등)를 하게된다. 본인에게 훌륭한 경력이 되는 것은 물론 나라 전체로 보아도 국제전문가를 하나라도 더 키울 수 있어 일견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획원 관료라는,남들이 선망하는 좋은 자리를 굳이 떠나 어려운 시험에 도전한 이면에는 또 다른 어두운 구석도 있다.
승진은 하늘에 별 따기이고 갈수록 일 할 맛도 나지 않는 과천 경제부처의 분위기를 잘 아는 주변 동료들이 『잘 생각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도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얼마전 같은 동료 과장이 언론사의 논설위원으로 옮겨갈 때도 기획원에서는 『용기가 부럽다』는 평과 함께 『자리가 하나 났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따라 붙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면접시험에 붙어도 워싱턴 본부에서 다시 2차 면접을 치러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1∼2명 정도만이 합격하는 매우 「좁은 문」을 뚫어야 한다.
지난달에 있었던 세계은행(IBRD) 직원채용 시험에도 승진 길이 꽉 막혀있는 재무부에서 엘리트 과장 한명이 5백대 1의 경쟁을 뚫고 워싱턴으로 떠났다.
또 다른 재무부의 과장 한명은 변호사로,사무관 한명은 목사로 전직했다.<민병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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