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아픔을 보듬는 두 가지 시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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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13면

미국 극작가 테너시 윌리엄스(1911~83)는 동성애자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폭력적인 남성 때문에 절망의 고독에 빠진 여성들의 아픔이 늘 강조돼 있다. 여성의 좌절된 꿈을 드러내며,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편파적인 현실을 비판하는 식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47)는 이런 윌리엄스의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드라마다.

한창호의 ‘영화·책·문학’

아마도 많은 독자는 퇴락한 귀족의 딸 블랑시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엘리아 카잔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블랑시 역으로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던 비비언 리가 열연한 덕택에 그녀의 인상은 더욱 뚜렷했다. 비비언 리는 연극무대로 돌아간 뒤에도 수도 없이 블랑시를 연기하여 관객들은 비비언 리를 보며 동시에 블랑시를 떠올릴 정도였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품던 블랑시의 꿈은 여동생의 남편인 스탠리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는데, 그 순간에 전달되는 남성의 야만적인 폭력은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압도적이고 일방적이다. 깨지기 쉬운 블랑시의 존재 자체가 아슬아슬했는데, 마치 야수에게 당하듯 상처 입는 극적인 순간은 역설적으로 그녀를 영원히 기억되는 캐릭터로 만들어 놓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은 단연코 블랑시인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입장은 좀 다르다. 그는 블랑시보다는 폭력적인 남성과 함께 사는 여동생 스텔라에게 더욱 주목한다. 블랑시는 스텔라의 집에 잠시 찾아온 손님이고, 여성을 무시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야수 같은 남성과 매일 살고 있는 여성은 바로 스텔라인 까닭이다. 그 스텔라가 아기를 안고 지긋지긋한 남편의 집을 떠나는 것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인데, 그 후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은 집을 떠난 스텔라에 대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상상처럼 보인다. 마누엘라(세실리아 로스)는 아들과 둘만 사는 간호사다. 아들의 생일날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러 갔다가 그만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만다. 그녀는 17년 전 이기적인 남편을 떠나 아들만 달랑 안고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도망쳐 왔는데, 이젠 겨우 키운 아들의 죽음을 그 남편에게 알리기 위해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것으로 도입부가 설정돼 있다.

마누엘라는 바르셀로나에서도 혼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고 또 본다. 아마추어 연극배우 시절 그 작품을 공연하며 남편을 만났고, 그 작품을 보다가 아들을 잃은 까닭이다. 그가 연기했던 역할이 스텔라였다. 마누엘라는 공연을 볼 때마다 스텔라가 마지막에 아기를 안고 남편을 떠나는 장면에서 늘 운다. 무슨 이유로 저리도 이기적인 남성을 사랑했는지 자기도 알 수 없고, 그 후 자신이 아기와 함께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이다. 그는 스텔라의 모습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고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동성애자다. 그 역시 윌리엄스처럼 여성의 좌절된 꿈에 남다른 슬픔을 보인다. 소박한 행복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남성이 없다면 차라리 세상은 행복해 보일 정도다. 그의 영화에서는 아무리 남성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더라도, 여성들은 그런 독선이 낳은 상처까지 인내하는 기품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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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씨는 미술과 몸을 섞은 영화 이야기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로 이름난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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