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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본화, 일본의 한국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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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시즈오카 현립대학의 고하리 스스무 교수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한국통이다. 한국 신문이나 지인을 통해 한국 정치에 대해 두루 꿰고 있을 텐데도 새삼 나의 생각을 물어왔다. ‘여전히’라는 말 속에는 ‘범여권에서 그토록 많이 의혹을 제기했는데도 불구하고’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터였다.

“글쎄요. 많은 한국인이 무능한 진보에 넌덜머리를 낸 것도 요인 아닐까요. 좀 때가 묻어 보여도 좋다. 일만 잘해 달라, 경제만 살려내면 눈감아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의 대답에 고하리 교수는 “참 재미있네요. 한국이 일본화하고 있네요. 반대로 요즘 일본은 한국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지난주 일본을 다녀왔다. 도쿄에서 이틀, 시즈오카에서 하루 묵었다. 일을 마치고 호텔 방에 돌아와 TV를 켜면 정부를 향한 유권자들의 분노가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도착한 첫날 엔도 다케히코 농수산상이 사임했다. 농업공제조합의 보조금을 부당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농수산성 사무차관도 사표를 냈다는 뉴스가 뒤를 이었다. 선거 때의 회계 부정이 드러난 고바야시 유타카 참의원의 의원직 사임 회견도 TV를 탔다. 정치자금 보고서를 허위로 기재한 가모시타 이치로 환경상, 가미카와 요코 저출산문제 담당 장관은 기자들의 추궁을 받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역시 아베 정권은 파리 목숨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제 아베 총리는 결국 물러났다.

 일본 유권자들이 내각이나 정치인에게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민영 TV들의 특집 프로그램은 다투어 ‘연금 횡령’ 뉴스를 전했다. 국민연금보험료를 다루는 사회보험청과 기초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장기간 거액의 연금을 횡령했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다. TV들은 일본 지도를 그려놓고 지자체별로 얼마씩 횡령했다는 비리를 상세히 전했다. 작가·연예인 등 패널로 등장한 이들은 “이런 명백한 범죄를 숨겨 왔다니…”라며 함께 목청을 높였다. 연예가 스캔들 따위를 전하며 웃고 떠들던 과거의 민방이 아니었다.

 정치인·관료의 도덕성에 대한 일본인의 기준은 정말 가혹할 정도로 엄해졌다. 사실 몇몇 각료의 잘못은 영수증 처리나 돈의 용처가 문제였지 본격적인 정치자금 범죄는 아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용서가 없었다.

 또 다른 한국통인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는 국가정책의 지향점 면에서 “일본이 한국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종전의 일본이 가치중립적인 평화헌법에 의지해 국제사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해 왔다면, 아베 정권은 ‘가치관을 드러내는 외교’라는 슬로건 아래 한국·중국·북한처럼 이념을 앞세우고 있다는 지적이다(『論座』10월호).

 확실히 일본은 얼마 전까지의 한국을 닮아가고 있다. 학력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유토리(여유)’ 교육정책도 포기했다. 초·중학생의 수업량은 1977년 이후 30년 만에 늘어나게 된다. 일본 정부의 경제재정자문회의는 국가공무원의 30%에 해당하는 10만 명을 감축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대한 보조금을 이미 대폭 삭감했다.

 반대로 한국은 과거의 일본을 흉내 내고 있다. 노무현 정권 들어 공무원은 6만6000여 명이나 늘었다. 공교육은 한가해지고 피폐해졌다.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 대통령부터 나서서 “깜도 안 된다”고 변호한다. 무슨 경품 행사라도 하듯 수백억원의 세금을 인센티브로 걸어놓고 지방마다 혁신도시를 만들면서 대통령이 “임기 안에 첫 삽을 뜨고 말뚝을 박고 대못을 박아두고 싶다”고 호언한다. 정부 조직을 슬림화하고 공직자에게 엄격하며, 학교교육을 강화하고 지자체의 자생력을 중시하는 일본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 일본의 한국화는 과거의 쓰라린 실패에서 얻은 교훈 덕분이다. 그러나 한국의 일본화는 무슨 교훈이나 깨달음에서 나온 것 같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세금 무서운 줄 모르는 ‘흥청망청 의식’ 탓인 것 같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