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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120원짜리 인생상담소 1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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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114 콜센터를 찾았습니다. 그간 수없이 통화를 해봤지만 정작 만날 수는 없었던 살가운 목소리의 주인공들. 얼굴 보니 따뜻했습니다. 이야기 들어보니 코끝 찡했습니다. 돌아서며 가슴 환했습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늦게 일어난 주말 냉장고가 텅 비었을 때, 잘 모르는 동네에서 차가 갑자기 멈췄을 때, 멀쩡하던 TV가 먹통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급히 찾는 전화번호. 1.1.4.
 114는 가까운 중국집, 자동차 수리업체, 가전제품 서비스센터 등 요긴한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생활의 친구’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114의 용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족이 모이는 추석, 찾아올 가족도 찾아갈 고향도 없는 70대 노인은 외로워 114를 누른다. 밤늦게까지 엄마를 기다리던 열 살 아이는 “엄마가 전화를 안 받아요”라고 훌쩍이며 수화기를 든다. 애인에게 차인 어떤 젊은이는 “여자들을 다 죽이고 싶다”며 애꿎은 114 여성안내원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이들에게 114는 ‘120원짜리 인생상담소’요, 내 전화를 24시간 받아주는 ‘베스트 프렌드’이며, 억울한 사연 속 시원히 털어놓는 ‘신문고’다. 전화번호 확인용 모니터와 자판, 작은 이어폰이 전부인 114 안내원 부스, week&이 그곳에 도착한 ‘얼굴 없는’ 우리 이웃들의 알록달록한 사연들을 들어봤다.

그냥 내 얘기 좀 들어주실래요

 

“사랑합니다. 고객님.” “네~, 접니다.” 또 그 사람이다. 충북에 사는 이 50대 아저씨는 하루 수십 번씩 114를 누른다. 114 전화비가 한 달에 20만원이 넘는다. 지난여름 장마 때 “비가 와서 마음도 싱숭생숭한데 내 이야기 좀 들어 달라”며 걸어온 전화가 시작이었다. 부인과 사별한 뒤 말할 상대가 없다, 농사를 계속 짓기 힘들다는 등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 아저씨, 이젠 안내원들의 이름을 줄줄 꿴다. “김 팀장님, 오늘 야근이신가?” “미스 리는 휴가 갔나?”며 안부까지 묻는다.

 제주도에 사는 김모씨는 날씨가 궂으면 “고기 잡으러 못 나가 혼자 술 마시고 있다”며 어김없이 전화를 건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었다고 “불쌍한 덕구~”를 부르며 대성통곡하던 아주머니도 있다. 대부분 홀로 살고 있는, 사람 목소리가 그리운 이들이다. 비 오는 날에는 “외롭다” “죽고 싶다”는 전화가 특히 많다.

 ‘전화번호 안내’가 주 업무인 안내원들이지만 차마 고개 돌릴 수 없는 가슴 아픈 사연들도 많다. 지난해 추석에는 한 남성이 안내원에게 번호 하나를 불러주며 “나 대신 전화 좀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혼한 뒤 아내와 살고 있는 딸인데 자신을 미워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간곡한 요청에 상담원은 소녀에게 “아빠가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니 전화를 받으라”고 설득해 연결해 줬다. 대구지부의 한 주부상담원은 지난해 11월 어느 날 밤 “배가 고프다”는 한 소년의 전화를 받았다. 동생 둘과 집에 있는데 아빠가 아침에 집을 나간 후 통화가 안 된다는 것. 아이들의 주소를 알아내 아침 퇴근길에 찾아가 보니 얇은 내의 차림의 9살, 6살, 5살짜리 3남매가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었다. 자장면을 시켜주고 돌아온 다음 날 아이들의 아버지가 114로 전화를 걸어왔다. “벌목하러 산 속에 들어가 전화를 못 받았다”며 “고맙다, 정말 고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 온갖 소식이 가장 빨리 도착하는 곳이 콜 센터다. 안내원들은 시내 어디서 불이 났는지, 정전이 됐는지 가장 먼저 안다. 선거철에는 정치인이나 청와대 번호를 알려달라는 문의가 줄을 잇는다.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있는 날은 한가하다. 단, 전반전이 끝나면 치킨 집 전화번호 문의로 콜 센터 전체가 북새통이다.

 환란 때부터 실직자들의 고민상담이 확 늘었다. 몇 년 전부터는 불황을 반영한 듯 ‘백수’들의 신세한탄도 많아졌다. “어느 날 30대 초반의 남성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취직자리 좀 소개해 달라며 하소연을 하더군요. 몇 번 이야기를 들어줬는데 몇 달 후에 취직했다고 자랑하더라고요.” 충남본부 이미경 대리의 말이다. 설이나 추석에는 외로움을 호소하는 전화가 유난히 많다. 연락이 끊긴 가족의 전화번호를 묻거나, 이사 간 고향 친구의 전화번호를 찾는 사람들도 명절의 ‘단골 고객’이다.

‘관심고객’ 문제의 그들

 

안내원들은 한 시간에 100건 이상의 문의를 처리한다. 1건 안내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15~18초. 아무리 ‘비단결 같은’ 마음씨의 안내원이라도 인생사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고객들의 말상대가 되어주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들은 ‘관심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구분돼 특별상담팀이 관리한다.

 114가 보유한 ‘관심고객’의 목록에는 상습적으로 욕설을 퍼붓거나 잘못된 번호 안내에 대해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관심고객전담팀은 때로는 고객의 집으로 찾아가 사과를 하기도 하고, 114에서 발행하는 달력 등 기념품을 선물하기도 한다. 고질민원 담당자인 충북본부의 윤기중 팀장은 “관심고객들의 상당수가 남자로, 혼자 살거나 가정생활이 원만치 않은 경우가 많다”면서 “찾아가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의 사연에 공감하게 되고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고객의 항의를 줄이려 애를 쓰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안내원들이 실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구본부의 한 안내원은 LPG 가스 대리점을 물어보는 고객의 질문을 잘못 알아들어 돈가스집 번호를 알려줬다. 번호를 문의했던 주부는 “가스 1통을 주문했는데, 돈가스 1인분이 배달돼 너무 황당했다”고 웃으며 항의하더란다. “임윤택씨”를 찾는 전화에 비슷한 이름의 택시회사를 알려주거나 “잘(JAL) 부탁합니다”라는 전화에 일본항공(JAL)을 찾는 줄 모르고 “네? 저도 잘 부탁합니다”라고 답한 일 등은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리는 ‘사건’이다. 최근에는 독특한 가게 이름이나 외래어 상호 때문에 안내가 더 어려워졌다. “X까는 집이요”라는 문의에 당황한 상담원이 검색해보니 진짜 ‘족까는 집’이라는 족발 전문점이 있더란다. “엘지 부라자”를 찾는 할아버지에게는 “엘지 플라자”를 검색해 가르쳐주고, “못된 소리인가, 그 학원 있잖아”라는 할머니의 질문에는 ‘몬테소리’를 찾아 가르쳐주는 ‘센스’도 114 상담원들이 갖춰야 할 필수 요건이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너희가 사랑을 알아?”

 

114의 인사말도 세월에 따라 변했다. 1980년대 “안내입니다”에서 1990년대에는 “네네~”로 바뀌었다. “네네~”라는 인사말은 개그맨들이 방송에서 자주 흉내 내며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1997년부터 “안녕하십니까”가 사용됐으나 지난해 7월부터는 “사랑합니다 고객님”이 쓰이고 있다.

 “사랑합니다”라는 인사말은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랑합니다”라는 인사에 “정말?”이나 “얼마나 사랑하는데?” 등의 반응은 애교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아느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고객들을 상대하기 위해 안내원들은 한때 사전에 나온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책상 귀퉁이에 붙여둬야 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인사에 “내 평생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면서 감격한 70대 할아버지는 상담원들의 마음까지 찡하게 했다. 전북본부에 전화를 걸어온 40대 남성은 “사랑합니다”라는 오경아 상담원의 인사에 “나를 사랑한다고? 내 얼굴을 보면 사랑한다고 못할걸”이라고 농담을 건넸다. 오경아 상담원 역시 “고객님도 제 얼굴 보시면 안내 받기 싫으실걸요”라고 응수했단다.

 ‘사랑’이라는 말의 어감 때문에 “그럼 당장 여기로 와라”, “나랑 자자”며 짓궂게 나오는 남자들도 많다. 이 때문에 오후 10시 이후에는 “사랑합니다” 대신 “안녕하십니까”라는 예전 인사말을 사용한다.

▶114 서비스는 …

 114는 1935년에 경성전화국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안내원들이 전화번호부를 뒤져 번호를 가르쳐주는 방식이었으나 1981년 을지전화국을 시작으로 전산화가 이뤄졌다. 현재 안내 업무는 2001년 KT에서 분사한 한국인포서비스㈜(KOIS·코이스), 한국인포데이타㈜(KOID·코이드)가 나누어 맡고 있다. 코이스는 서울·경기·강원지역, 코이드는 충청, 영·호남, 제주 지역의 서비스를 담당한다. 안내원은 코이스에 1300명, 코이드에 2200명이 근무하며 모두 여자다. 남자들이 안내원으로 입사한 경우도 있었지만 “고객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부담스러워 해 그냥 끊는 경우도 많다”는 게 114 측의 설명이다.

글=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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