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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이쓰는가정이야기>미안하다 얘들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대지진에 뒤따르는 여진인양 요즘도 성적 관리에 문제있는 학교를 다룬 기사를 신문에서 이따금 접하곤 한다.
그런 유의 기사는 아무리 작게 취급된 것일지라도 고3자식을 가진 우리 같은 부모에겐 대문짝 이상의 큰 규모로 다가오게 마련이다.장난칠 게 그렇게도 없어 이젠 아이들 성적까지 갖고 장난친단 말인가.기껏 가라앉혔던 분노가 슬그머니 또 고개를 든다. 전쟁과 혁명.쿠데타 등을 두루 겪는 사이에 강심장으로 단련된 우리네 기성세대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각종 사건.사고에 잘 길들여져 이제 웬만한 일로는 놀라거나 분개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둔감해지고 담대해졌다.
그러나 자식들 교육문제 만큼은 전혀 경우가 다르다.이른바 상문고 비리가 터졌을 때 우리 부부를 휘어잡은 감정은 경악과 분격.절망이었다.요즘 유행하는 말 그대로 정말「우째 이런 일이!」였다. 옆에서 자식이 듣는 것도 아랑곳없이 우리는 마구 험구를 놀렸다.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니었다.대학 입시가 당장 코 앞의 일로 닥쳐온 우리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였다.
내신 성적을 변조하거나 잘못 관리한 학교가 전국적으로 한 둘이 아닌데 내 자식과 상관없는 학교라고 해서 안심할 처지도 못됐다.당장 내 자식의 내신에 직접적인 영향은 미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학교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내신을 올린 어떤 학생이공교롭게도 내 자식하고 같은 대학,같은 학과를 지원함으로써 장차 결정적인 불이익을 주게 될지 누가 알랴.
대의명분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에 의해 상문고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한 것은 흥분에 싸여아내와 함께 한바탕 성토대회를 벌인 다음이었다.정정당당히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여건조차 제대로 갖춰 주지 않은채 사랑하는 자식들을 살인적인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 땅의 부모로서 나는 내 아이와 그 또래 모두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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