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터지는 소주폭탄? 일본은 지금 '호피'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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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드릴까요?”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 일본 도쿄(東京)의 이자카야(居酒屋)나 야키도리(燒き鳥)에 가면 종업원이 첫마디에 물어 보는 첫마디다. 퇴근길에 들러 한 잔 하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직장인들 대부분이 이 호피를 마신다.

‘호피(Hoppy)’란 1948년 7월 15일 도쿄의 한 청량음료 회사에서 개발한 발포성 맥아발효 음료다. 알콜 도수는 0.8%(OB 맥주는 4.4%, 아사히 생맥주는 5%). 맥주맛이 나는 탄산음료라고 보면 된다. 그냥 마셔도 청량음료로 손색이 없지만 처음부터 소주에 타마시기 위한 맥주맛 음료로 탄생했다.

호피를 주문하면 으레 500cc 생맥주잔이 따라 나온다. 이 안에는 소주가 100cc쯤 들어있다. 두번 걸러 재료의 향이나 맛이 없는 고슈쇼주(甲種燒酒ㆍ알콜 도수 25%)다. 여기에 호피를 부은 다음 적당히 섞어 마시면 된다. 잔이나 소주, 호피를 모두 차게 해서 마신다는 의미에서 산레이(三冷)라고 한다. 호피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술 자체를 호피라고도 한다. 소주와 호피의 비율을 1대 5로 섞으면 맛도 알콜 도수(5%)도 맥주와 비슷해진다.

호피는 원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가난한 도쿄 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술. 당시 맥주는 일반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호피는 맥주 대용품으로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후 경제성장에 힘입어 서민들도 쉽게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면서 시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버블 경제가 끝나고 호주머니가 가벼운 직장인들이 하나둘씩 호피를 찾기 시작했다. 원래 소주를 뜨거운 물이나 얼음, 레몬즙, 우롱차와 섞어 마시던 사람들이, 50년대초 전후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값싼 호피를 섞어마시기 시작했다. 이자카야에서 미즈와리 소주(소주에 얼음과 물 섞은 것) 1잔에 300엔, 호피 칵테일(호피에 소주 섞은 것) 1잔에 450엔이다. 삿포로 생맥주 1잔(650엔)보다 200엔이나 싸다.

2년전부터 도쿄를 중심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호피는 맥주에 들어 있는 푸린(요산 성분으로 통풍을 유발한다)이 없는데다 ‘거품 제로’‘저칼로리’‘저당질’의 건강음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소주에 맥주맛 청량음료를 섞어 맥주 대용품으로 마셔야했던 가난한 옛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노스탤지어 상품’으로도 자리잡았다. 앞만 보고 달려오던 일본인들이 호피를 마시며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호피의 연간 매출액은 지난해 23억 3000만엔(약 200억원). 5년전에 비해 두 배로 늘었다. 별다른 광고를 하지도 않았지만 홈페이지(hoppy-happy.com)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일기장이 입소문을 타면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일기장의 주인공은 3년전 부사장으로 취임한 창업주의 손녀딸 이시와타리 미나(石渡美奈ㆍ39)다.

도쿄=이장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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