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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매미'때 떠난 예비부부 영혼결혼식 그 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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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Lord for giving me life unto death (잊혀지지 않은 너는 떠난 것이 아니다).”

2003년 9월 12일. 태풍 ‘매미’가 경남 마산 해안지역을 덮쳤다. 갑자기 인근 해운프라자 건물로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이곳 지하에 있던 한 쌍의 남녀가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다음해 봄 결혼을 앞두고 있던 예비부부 고(故) 정시현(당시 28세)씨와 서영은(당시 23세)씨. 시현ㆍ영은씨를 하늘로 보낸 양측 가족과 친구들은 아픔을 추스르고 2004년 2월 추모카페 ‘시현영은’을 만들어 4년째 안타까움의 편지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도 전화를 걸면 ‘아빠’하며 받을 것 같고, 지금도 문자를 치면 대답이 올 것 같고, e-메일을 열면 너의 e-메일이 도착해 있을 것도 같고, 그런데 그건 오직 이 세상의 바람일 뿐이지…, 아빠도 곧 하늘 나라로 갈 것이고, 그때 우리 다시 만나자. 사랑해 영원히.” 영은씨 아버지 서의호(52ㆍ포스텍 산업공학과) 교수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과 이별한 큰 딸에 대한 아픈 가슴을 매일 글로 표현한다.

지난 6월에는 “봄학기 마지막 수업이 끝났는데 캠퍼스에서 오가는 여학생들을 볼 때마다 아빠 눈에는 우리 영은이가 오버랩되는구나. 아빠는 매일 그렇게 영은이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서교수에게 딸은 항상 복수(複數)다. “둘째 딸에게 가끔 사랑한다는 문자가 와요. 그럼 전 이렇게 보내죠. 나도 딸들을 사랑해.” 서 교수는 시현씨에게도 ‘시현 사위’라 부르며 편지 보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려다 목숨을 버린 우리 사위 시현이’라는 말머리로 안타까움을 이어갔다. 서 교수는 태풍 매미 참사 이후 매년 10월 27일 시현씨의 생일엔 “우리 사위, 생일 진심으로 축하하네”라는 글을 남겼다. “둘이 그곳에서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있을 것이라고 믿네” “내 생일에 체육복을 선물한 자네 모습이 선명하게 생각나네” “자네가 준 체육복을 입고 오늘 테니스를 쳤지” “난 자네를 오늘도 잊지 못하고 이렇게 그리워 하고 있네. 영혼으로 만나기를 오늘도 기도하네” 라고 썼다.

서 교수는 2004년 추모 1주기 9월, 딸과 사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사진, 편지, 추모글을 모아 『하늘에 핀 사랑의 꽃』이라는 책을 엮어냈다. 당초 추모 문집 수익금을 딸과 사위가 다녔던 대학에 장학기금으로 기탁, 어려운 학생들을 도우려고 했으나 여러 사정상 실행하지 못했다. 대신 태풍 피해 보상금 일부와 광고 방송의 수익금을 사위가 다녔던 경북대에 재해방지 연구기금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광고는 서 교수의 딸과 사위의 얘기를 소재로 만든 휴대폰 회사의 CF다. “딸과 사위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내가 남아 있는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도라고 생각합니다.”

시현씨의 아버지 정계환(67ㆍ전 경남대 기계자동화공학부) 교수는 “흐린 하늘만 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자식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4년이 지났지만 가슴에 자식을 묻는 것은 쉽지 않은가 보다. 10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정 교수의 울먹임에는 아들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 교수에게 돌아온 대답이다. 시현ㆍ영은씨 부모들은 포항과 마산을 오가며 두 달에 한번 꼴로 꼭 만난다. 아이들의 어렸을 적을 이야기하며 식사도 하고 함께 운동도 다닌다.

시현ㆍ영은씨 장례식날 두 부모는 이들의 영혼 결혼식을 치렀다. 더 좋은 세상에서 서로 아껴주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면서. 사고를 당한 해 겨울엔 두 부부가 자식을 가슴에 묻기 위해 제주도로 3박4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12일에는 ‘태풍 매미’ 희생자 4주기 추모제가 열린다. 4년째 서로 의지하며 위로하는 이들 사돈들은 “앞으로 재해로 인해 우리 시현이와 영은이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물속에 휩쓸리는 고통속에 자유를 꿈꾸다 하늘로 날아간 ‘인어공주’ 서영은,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한 공주를 위해 기꺼이 목숨버린 ‘어린왕자’ 정시현, 이제 우리는 그대들을 쉬게 해야겠다…오늘도 그리움으로 되살아오는 푸른 별 시현, 고운 별 영은...안녕 ! 안녕 !”

시현ㆍ영은씨 부부를 위해 이혜인 수녀가 쓴 추모시 '그리움이 된 푸른 별'의 일부다.

이지은 기자

◇태풍 매미 [typhoon Maemi] = 2003년 9월 6일 발생해 9월 14일 소멸한 중형급 태풍. 전체 피해규모가 5조 원에 육박했고 인명피해는 사망 107명, 실종 20명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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