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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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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본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첫째 요소는 직립해 걷는다는 데 있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즉 척추를 곧추세워 걷는 사람이다. 그것이 가능했기에 손이 자유로워져 ‘만드는 사람’, 곧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될 수 있었다. 아울러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하고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사람의 두뇌와 지력은 획기적으로 증진했다. 그 덕분에 생각하는 사람,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전진해 올 수 있었다.

걷는다는 사실 자체에는 바로 이런 사람됨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 우리가 아주 쉽게 생각하고 때로 천하게까지 여기는 걷기는 바로 사람됨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걷지 않았다면 아예 사람이 못 됐다. 걸음으로써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됨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걸을 일이 없어진다는 데 비극의 단초가 있다.

우리로 하여금 걸을 일이 점점 더 없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자동차다. 19세기에 발명된 자동차는 20세기 최고의 상품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자동차는 여전히 유용한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보다 사람다운 삶과 조화를 이뤄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자동차는 사람을 매연과 교통사고로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덜 걷게 해 조금씩 조금씩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동차 자체가 문제일 순 없다. 굳이 차를 타지 않고도 갈 수 있는 길마저 애써 차를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타성이 문제다.

하지만 이제는 벼랑 끝이다. 살고 싶거든 차에서 내려라. 내려서 걸어라. 걷는 만큼 산다. 걷는 만큼 살도 내린다. 물론 그만큼 공기의 질은 오른다. 사실 이런 말들이 날마다 자기 두 발로 ‘뚜벅이’ 신세인 사람들에겐 생뚱맞은 것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차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사장이든, 회장이든, 그 무엇이든 지체 높은 사람들부터 내려서 걸어라. 일주일에 한두 번은 차 없이 출근해 보라. 5분 거리도 안 되는 식사 장소에 굳이 기사를 앞세워 차를 타고 가는 것부터 바꿔라. 남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다. 지게 지고 종일 걷는 머슴이 가마 타고 수레 타는 주인보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

10일은 서울시가 정한 ‘차 없는 날’이다. 하지만 정작 본래부터 날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걷던 사람들에게는 ‘차 없는 날’이 오히려 낯설다. 되레 ‘차 없는 날’ 지하철과 버스만 더 붐비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차편으로 아이들을 친정이나 시댁, 혹은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맞벌이 부부에겐 번거롭다 못해 대책 안 서는 날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사장·회장, 높은 자리에 있는 양반들은 기사 달린 자동차에 앉아 차량 통제된 종로만 피해 쌩쌩 달린다? 욕 나오는 상황이 불 보듯 그려진다.

결국 ‘차 없는 날’이 일년에 한 번 있는 이벤트로 치러지는 한 ‘차 없는 날’은 불편한 날, 외출을 포기하는 날, 혹은 대책 없이 난감한 날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벤트로서의 ‘차 없는 날’은 역설적이지만 하루속히 없어져야 한다. 그 대신 시민 스스로 차에서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걷기를 즐기며 느림과 낭만, 그리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일상의 작은 혁명이 일어나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오세훈 서울시장의 ‘에코(eco·환경) 리더십’의 과제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