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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을살리자>25.배-늦게 익지만 저장성 뛰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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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제/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多情도 病인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벚꽃이 한물 간 요즈음지방나들이길에 흐드러진 배꽃을 본 사람이면 한번쯤 읊조려 봄직한 고려때 시인 李兆年(1269~1343)의 유명한 시조다.
예부터 우리선조들은 화려함보다 청초미를 좋아한 까닭에 봄꽃을즐기는데도 원색의 개나리나 진달래보다 배꽃을 더 쳤다.
唐絲같이 휘감기는 달빛을 받으며 함초롬히 피어났다가 봄비의 시샘에 속절없이 지고마는 배꽃의 운명이 恨많은 우리네 정서에 선뜻 와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꽃과 열매를 모두 즐길 수 있는몇 안되는 과수로서 오랜 세월 곁에 두고 키워온 데서 비롯됐을터이다. 중부유럽.중국북부지역등이 원산지인 배나무가 이 땅에서길러지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양원왕2년(546년)2월「王都에 있는 배나무(梨樹)가連理(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끼리 맞닿아 하나로 붙는 것으로 천자의 덕이 고루 퍼질 때 나타나는 吉兆)」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 삼국유사에「신라 혜공왕(765~779)때 角干大恭의 집 배나무(梨木)에 참새떼가 많이 모였다」는 대목이 있는 점으로 미뤄 당시 이미 한반도 전역에서 배나무가 재배됐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고려에 들어서는 인종25년(1145)과 명종18년(1188)에 각각 조정에서 직접 배나무의 재배를 권장하기도 했다. 이같이 오랜 재배역사를 갖고 있는 배가 토착화과정에서 다양한 품종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일.
지금까지 나주의 배연구소등에서 파악하고 있는 토종배는 모두 60여가지.이 가운데 학명이 밝혀진 것은 靑實梨.黃實梨.水香배.임계배.弘濟梨등 24가지뿐이고 콩배.좀돌배.백운산배등 13가지는 야생종으로 확인됐으며 상모등 25가지는 아직 까지 연구중이다. 특히 이중 수향배.홍제리.임계배등 세가지는 국내에서 이미 없어졌다가 86년 일본에 보관중인 것이 확인돼 들여온 품종이다. 여기에다 1611년 펴낸 許筠의『屠門大嚼』에는 天賜梨(강릉).金色梨(정선).玄梨(평안도).大熱梨(평안도).紅梨(안변)등 다섯가지 품종을 소개하고 있고 19세기에 쓰인 작자미상의『完板本春香傳』에서도 59가지나 소개하고 있어 현재 파 악되고있는 것과 겹치지 않은 종류가 있을 것으로 볼 때 토종배의 가짓수는 70여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토종배중 대표적인 것은 함흥이 주산지인 청실리(네).
단맛이 뛰어나고 배나무에 치명적인 검은무늬병등 질병에 강한데다 둥그런 모양의 과실이 개당 8백g이나 될 정도로 크다.
청실리는 그러나 10월하순에야 익는 극만생종으로 石細胞가 많아 씹을 때 오돌오돌한 느낌을 주는데 저장시켜 익히면 과육이 연해지고 맛이 우러나는 전형적인「묵이배」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청실리는 69년 일본종인 長十郎과 교배,당도가 높으면서도 내한성과 검은무늬병에 특히 강한 단배를 개발해 내는데 쓰였으며 90년에는 단배의 결점인 약한 저장성과 두꺼운 껍질을 개량한 甘川배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과실의 크기가 청실리만하고 달걀모양인 황실리 역시 10월하순~11월초순 따 묵혀 먹는 극만생품종으로 청실리에 비해 단맛이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이 배는 경기.강원등 중부지방에서 오랜 세월 심어져 왔을 정도로 특히 추위에 견디는 힘이 좋아 현재 학계에서는 세계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신고등 일본품종을 뛰어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원으로 평가 하고 있다.
청실리.황실리는 취앙네(평남).분실네.고실네(이상 중부지방)등 다른 토종배 이름과 마찬가지로 친숙함을 나타내기 위해 배를의인화시켜 청실네.황실네로 불려지기도 했다.
또 강원도 인제지역에서만 나는 무심이(無心梨)는 열매가 오리알보다 조금 클 정도로 작지만 속이 작고 연한데다 물이 많고 단맛이 뛰어나 조선시대에 진상품으로 이름을 날렸던 품종.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진 무심이는 인제지역을 벗어날 경우 나무가 대부분 말라죽는 까다로운 성질을 갖고 있지만 본 고장에서는 농약 한번 치지 않을 정도로 병충해에 강하다.
첫눈이 내릴 때 수확하는 극만생종으로 저장성이 아주 뛰어나 왕겨에 묻어 두면 이듬해 추석때까지 속이 노랗게 익으면서 독특한 맛과 향기를 낸다.
이밖에 함경도 원산지방 특산으로 모양이 방추형이고 황갈색을 띠며 당도가 높은 편이나 10월중순께나 익고 3백~4백g밖에 나가지 않는 만생종인 수향배가 있다.
둥글납작한 모양에 녹황갈색을 띠며 무게가 4백~5백g정도인 참배등도 손꼽히는 토종배다.
특히 평안도지방에서 주로 재배된 참배는 익는 시기가 10월하순인 만생종으로 일부에서는 分錢 또는 豊梨라고 불리기도 하는데꼭지길이가 보통 6㎝정도로 3~4㎝인 여느 토종보다 긴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들 토종배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모두「돌배」수준으로 과실자체로는 상품성이 거의 없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중국품종에 없는 특유의 향기와 맛을 지니고 있는데다 나무의 자람세나 질병저항성등이 좋아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바탕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수원과수연구소와 나주 배연구소등에서 지금까지 토종을 이용해 개발한 새 품종배는 단배.영산배.감천배.원교15호등 모두 8가지. 그러나 일본에서 우리의 토종인 것으로 확인된 것만 세가지인 점으로 미뤄 신고(新高).만삼길(萬三吉)등 국내에서 널리 재배되는 대부분의 일본품종에도 토종유전인자가 섞여 있을 것으로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현재도 이들 연구기관들에서는 수집된 토종배의 특성조사를 통해장.단점을 분석한 뒤 보다 크고 맛도 좋으면서 저장성이 뛰어난개량종을 만들어 내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열매를 맺을 경우 농산물 수입개방의 압력을 이겨내는 작목으로 크게 각광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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