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도 산책하는 시간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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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를 기억하는가? 아빠 물고기 ‘말린’이 아들 물고기 ‘니모’와 함께 떠난 모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제 아무리 드넓은 바다라고 해도 조그만 물고기에 불과한 크라운 피시에게 안전지대란 없다. 커다란 물고기들 등살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환경 속에서 외아들 ‘니모’를 키우려니 아빠 물고기 ‘말린’이 신경쇠약 환자가 될 수밖에 도리가 있겠는가.


영화 속도 저토록 힘든데, 실제 세상의 물고기들은 어떨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63빌딩 씨월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쿠아리스트 박선숙씨를 찾아갔다.

알록달록한 열대어며 능청맞은 거북이, 갓 신방을 차린 펭귄, 우주 속 미아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환상적인 해파리, 가까이 가기에도 겁나는 커다란 가오리 등 바다 속 일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씨월드.
선숙씨 말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세상과 실제 수중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단다. 먹이를 풍부하게 제공받는 수족관 물고기들도 영역 다툼이 있을 때는 워낙 치열해서 ‘니모’같은 작은 물고기들은 약자들만의 공간을 따로 만들어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물고기들을 종류별로 분리시켜 놓을 순 없는 노릇. 대형 수족관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녀석들을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 기세가 다양하다. 선숙씨가 날렵한 동작으로 입수하자 수족관 분위기가 삽시간에 둘로 나뉘는데, 공격적인 녀석들은 재빠르게 그녀를 에워싸고 먹이를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쟁탈전이다. 한편 순한 녀석들은 바로 이때를 틈 타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하니 이름하야 ‘여린 물고기들의 산책 시간’!

먹성 좋은 가오리를 한 쪽으로 유인한 후 먹이를 주는 선숙씨, 자기 것 다 먹고도 또 그것을 뺏어먹으려 하는 사나운 녀석의 공격. 분위기는 점점 살벌해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돌 틈에 숨어 유유자적하는 유순한 무리들이 보인다. 제 아무리 사나운 상대라도 먹이를 먹는 동안만큼은 자신들을 괴롭힐 이유가 없으니 선숙씨가 입수한 시간이야 말로 이들에겐 가장 맘 편히 노닐 수 있는 순간인 셈이다.
그들의 마음을 잘 아는 선숙씨, 가오리에게 먹이를 천천히 먹이는 노하우를 발휘하며 사나운 녀석들을 좀 더 붙들고 있어보지만 그 시간도 곧 끝나게 마련이다. 선숙씨가 사라지고 나면 편히 놀던 물고기들은 다시 긴장해야 한다.

바다 속 생물들에 비하면 정말 편하게 살고 있는 녀석들인데도 개성이 모두 달라 일일이 신경 쓰게 된다는 게 선숙씨의 말이다. 젖은 머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입수해서 약한 녀석들부터 보살피니 과연 10년 경력의 물고기 엄마답다. 녀석들, 엄마 잘 만난 덕분에 그래도 하루 두 차례 이상 한적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으니 이만하면 ‘니모 부자(父子)’ 보다는 확실히 상팔자가 아닐까?

처음에는 눈 여겨 보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선숙씨의 설명을 듣고 보니 작은 물고기라들이 여유 있게 노니는 모습이 더욱 즐거워 보인다. 물고기나 사람이나 역시 ‘마음의 여유가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말은 절대불변의 진리다.

설은영 객원기자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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