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로론 핵개발 못하는데…/김일성 미에 제공요구 주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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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 흑연로 대체용으로/2조원이나 되는 교체비용이 문제
김일성 북한 주석이 최근 미 워싱턴 타임스지와의 회견에서 핵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에 대해 경수로형 원자로의 제공을 요구해와 관심을 끌고 있다.
흑연로형 원자로를 집중적으로 개발해온 북한이 태도를 바꿔 경수로형 원자로를 원하는데 대해 전문가들은 일단 정치적·기술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흑연로와 경수로는 사용되는 핵연료나 감속재·냉각재 등에 큰 차이가 있다.
이같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가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것이다.
흑연로는 경수로에 비해 핵연료의 교체가 훨씬 쉬운데 이는 핵연료의 잦은 교체를 통해 군사용 플루토늄을 다량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 주석이 페기할 수도 있다는 방사화학실험실은 바로 이같은 흑연로에서 나온 플루토늄을 군사용으로 재처리하는 시설로 주목받아온 곳이다.
반면 경수로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원전에서 채택하고 있는 노형으로 핵연료를 태운후 생기는 분열성 플루토늄의 순도가 70%에도 못미쳐 재처리시설이 있더라도 발전용 경수로를 이용해 핵무기를 개발할 수는 없다. 플루토늄이 핵무기의 원료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90% 이상의 순도를 유지해야 한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안전성이다.
흑연로는 핵분열반응을 조절하는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는데 이는 경수로에서 감속재로 사용되는 물에 비해 비상시 혹은 이상운전시 안전성이 훨씬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노심이 녹아내리는 사고를 낸 체르노빌 원전도 흑연로로 안전성이 이처럼 떨어지는데도 구 소련 등 공산권 국가가 흑연로를 고집해온 것은 군사용 플루토늄을 손쉽게 얻으려했기 때문이다.
흑연로와 경수로의 이같은 차이를 고려할 때 북한이 이번에 경수로를 원한 것이 사실이라면 일단 핵개발을 중지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경수로형 원자로는 1기 건설비용이 2조원(1백만㎾ 기준)에 이르는 등 막대한 돈이 투입돼야 하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제의를 수용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또 이 과정에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부담해야 할 몫이 커질 수도 있어 이 문제는 신중히 고려해야 할 사안이라는게 지배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김 주석의 경수로 문제 언급에서 확실한 것은 북한이 이제 그들이 쓸 수 있는 「핵카드」가 거의 소진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북한의 이번 제스처는 막바지에 몰린 그들이 명분과 실리를 함께 얻으면서 탈출구를 찾으려는 의도이거나,수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저의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김창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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