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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 다니던 광화문 옛 길 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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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광화문 옛터를 발굴하고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6일 현장을 공개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오른쪽에서 둘째)이 옛 광화문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강정현 기자]

광화문 옛터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가 1927년 광화문을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기고 꼭 80년 만이다. 문화재청이 추진 중인 '경복궁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 정비사업' 일환으로 광화문 터를 발굴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6일 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광화문 터는 지금의 도로 밑 70cm 깊이에 있었다. 파헤쳐진 흙 사이로 기단과 지대석이 보였다. 광화문의 3개 무지개문 터와 문 양 옆의 궁궐 담장 흔적, 임금이 다니던 어도(御道), 그 앞 광장인 월대(月臺) 자리까지 오롯이 보존돼 있었다. 조선시대 경복궁을 드나들던 이들이 지나던 흔적인 셈이다.

6월까지 해체된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떨어진 지점이 광화문의 원래 위치였음이 이번 발굴에서 확인됐다. 한국전쟁 때 피폭으로 훼손된 것을 68년 복원하면서 경복궁 중심 축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3.75도 틀어진 반면 이번에 드러난 광화문 터는 경복궁 축과 정확히 일치한다.

원래 광화문은 장방형 돌을 쌓아 만든 육축(陸築)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지붕으로 문루(門樓)를 세웠다. 육축에는 3개 무지개문을 마련했다. 이 삼홍예문(三虹霓門)은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서는 광화문이 유일하다. 이 중에서 왕만이 사용하던 중앙문은 너비가 500cm로 가장 넓고, 문관과 무관이 각각 출입하던 동문과 서문은 너비가 같은 350cm였다. 월대는 이 광화문 터 남쪽에 연결돼 동서 29.7m, 남북 8.3m가 현재까지 드러났다. 연구소 측은 "월대의 원래 크기가 남북 길이 52m인 점을 감안할 때 세종로 지하에 43.7m가 더 묻혀있을 걸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월대의 난간석인 동자석 40개는 일제 때 옮겨지면서 없어졌으나 최근 그중 하나로 추정되는 것이 청와대 경비대가 있는 경복궁 뒷동산인 녹산(鹿山)에서 발견됐다. 동자석에는 경비대서 쓴 걸로 추정되는 '예방하고 이상 무 보고하자'는 문구가 페인트로 적혀 있었다.

기단석 기준으로 현재까지 드러난 광화문 터는 동서 34.8m, 남북 10.2m(총 14.7m)며 이는 원래 광화문 규모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이 밖에 식민지 시대에 만든 전차 선로 일부와 전신주 흔적이 드러났으며, 청자 뚜껑과 분청사기.백자.청화백자 등의 도자기류와 기와.전돌(벽돌)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번에 확인한 광화문의 옛 위치 그대로 이르면 2009년 말까지 복원할 것이며, 월대는 전체 52m 중 세종로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인 8.3m까지 되살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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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태조 4년(1395년)에 창건됐다. 세종 8년(1426년) 집현전 학자들이 '빛이 사방을 덮고, 감화가 사방에 미친다(光被四表 化及萬方)'는 의미로 명명했다. 임진왜란(1592년) 때 불타고 300여 년 만인 고종 2년(1865년)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함께 중건됐다. 그러나 일제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하면서 1927년 건춘문 북편(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으로 옮겼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1951년께) 피폭으로 문루가 소실됐다. 복원사업을 위해 해체되기 전까지 세종로에 있던 광화문은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재건된 것이다. 당시 도로와 주변 건물들에 맞추느라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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