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서늘한 머리 따뜻한 가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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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늘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 같이 가는 정책은 물론 좋은 정책이다. 만약 양자가 가리키는 정책이 서로 다를 때는 어떨까? 이게 정부 정책의 고민이다.

온 국민의 마음을 졸이게 한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가 40여 일 만에 끝났다. 아깝게 희생된 두 분을 빼고 나머지 19명이 모두 풀려난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피랍 사태가 막 끝난 이제 우리는 이 사태를 돌아보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국가의 역할과 정책에 관해 엄중한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 정부는 ‘테러단체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원칙을 무시하고 전면에 나서서 탈레반과 협상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지난 주말에 “국민의 생명이라는 소중한 가치와 국가 위신이라는 가치가 충돌한다”며 “현실적 의미에서 전 세계 대세를 거역했을 때 외교상 부담이 있지만 내부적으로 많은 토론과 갈등을 겪어 나왔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은 유감스럽게도 맞지 않다. 테러단체와의 협상으로 국가 위신이 깎이고 세계 대세를 거역하는 외교적 부담만 있다면 약과다. 문제는 현재 피랍 국민의 생명이라는 소중한 가치와 미래의 잠재적인 피랍 국민의 생명이라는 소중한 가치가 충돌하고 후자가 훨씬 커진다는 데 있다.

치안이 불안한 나라를 여행하던 우리나라 관광객 20여 명이 테러단체에 의해 또 납치됐다고 가정해 보자. 협상을 요구하고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인질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위협을 실증하려는 듯이 세 명이나 죽이고 추가로 계속 죽이겠다고 나서면?

재수없는 가정이라고 타박할 일이 아니다. 정부가 나선 이번 협상이 세계 도처의 한국민을 납치의 표적으로 만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경제학은 이런 고약한 상황을 따뜻한 가슴이 아니라 서늘한 머리로 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당장에 협상하면 무고한 국민을 구출할 수 있어 좋다. 그러나 납치가 수익성 있는 활동으로 테러단체에 인식돼 미래의 납치활동을 조장하고, 따라서 앞으로 무고한 국민의 희생이 커진다.

처음부터 협상은 없다고 모질게 나가는 것이 당장에는 희생이 따르지만 미래의 납치활동을 없애는 최적(最適)정책이다. 이를 ‘최적정책의 시간 비일관성’이라 한다. “테러단체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원칙이 준수되는 이유다.

이번 피랍 사태는 엉겁결에 당한 대규모 납치였고 우리 국민도 냉엄한 국제사회의 원칙에 무지했던 만큼 정부가 사태 해결에 나선 것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그러나 국정원장까지 전면에 나서 타결을 서두른 것은 아주 잘못한 일이다.

지난해 봄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있었던 원양어업 선원 납치 사건에서처럼 정부가 전면에 나서지 말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했어야 한다. 그러면 시간이 걸리고 추가적인 희생의 위험이 따랐겠지만 우리 정부가 전 세계 대세를 거역하는 미숙아로 낙인 찍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 정부와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판도라의 상자를 닫기 위해 ‘시간 비일관성의 주술(呪術)’을 깨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대통령이 “앞으로 다시는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는다”고 하루빨리 선언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선언을 준수하는 것이다. 국정원장을 바꾸는 것도 선언의 신뢰성을 높이는 유력한 방법이다.

이번에 협상에 응한 전력 때문에 ‘단 한 번만’을 전략적으로 시험하는 고약한 납치사태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 틈새에 끼지 않도록 우리 국민은 몸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내 자식이나 손자가 잡혔어도 협상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대통령의 선언을 수용해야 한다.

그게 납치의 확대 재생산을 막고 국제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이 되는 통과의례다.

안국신 중앙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