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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창극칼럼

보고도 보지 못한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중진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을 따라 지난주 일본에 가서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나는 조선의 정치 엘리트들이 임진왜란 이후 12차례나 일본을 방문하면서 무엇을 보고 갔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때 그들이 일본을 제대로 보았다면 300년 뒤 또다시 한일병합이라는 치욕을 겪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무슨 힘으로 이런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이들에게 또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조선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이런 것들이 통신사들의 제일의 관심이어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을 보기는 보았으되 보지 못했다.

그들의 눈을 가린 것은 당시 이데올로기였던 주자학이었다. 예절을 숭상하는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은 금수와도 같은 나라였다. 남자들은 거의 벌거벗은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남녀가 혼탕을 하는,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부도덕한 나라였다. 또 하나 이들의 눈을 가린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증오심과 적개심이었다. 호화찬란한 집이나 정원·사찰을 보아도 그것을 부의 축적으로 보지 못하고 낭비가 심하다고 트집잡았다. 소득에 따라 누구라도 큰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보고는 상하질서가 없다고 비판했을 뿐 이것이 사유재산의 존중이라는 사실은 보지 못했다(고병익, ‘群倭와 琪花瑤草’). 규슈 북서쪽 대마도가 육안으로 보이는 가라쓰(唐津)라는 포구에 가 보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곳에 5개월 만에 성을 쌓고, 2000여 척의 배를 징발하고 25만 명을 집결시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훈련시켜 조선을 침략했다. 낮은 언덕뿐이던 이곳을 하루아침에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건설한 일본의 국력에 조선통신사들은 무관심했다. 주자가례로만 일본을 보니 그저 무지하고 금수 같은 나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맹점이다. 모든 것을 그 이론에 꿰맞추어 보면 해석이 척척 되고 해결책도 간단하다. 좌파 이데올로기로 보면 이 나라의 모든 문젯거리는 가진 자와 배운 자이며, 그로 인해 빚어진 불평등이다. 그 해결책은 이들을 끌어내려 평등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경제가 어려워지고 교육이 이 모양이 된 이유는 현재 집권자들의 눈꺼풀이 좌파 이데올로기로 덮여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가 주자학 이데올로기와 적개심 때문에 눈이 멀었듯이 말이다.

며칠 전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가 IHT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의 성공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 덕이라면서 철저한 실용주의 노선을 강조했다. 모든 정책의 판단은 “나라의 생존과 발전에 그것이 필요한가, 또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가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와 경쟁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협력해야 할 일본과 중국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나 세력집단의 몸에 밴 사상을 바꾸기란 매우 힘들다. 분칠은 할 수 있겠지만 바탕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대를 바꾸기 위해서는 인물을 바꾸어야 한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이 말이다. 먼저 지도자의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런 지도자를 볼 수 있는 국민의 눈도 열려야 한다. 보고도 보지 못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