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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보기관 위상 실추시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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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됐다 풀려난 한국인 19명이 2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해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 김만복 국정원장(右)이 함께 서있다. [사진=조용철 기자]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의 과잉 노출과 부적절한 처신 문제가 확산되고 있다. 자신의 존재나 동선 자체가 국가 기밀 사항인 국가정보기관 책임자가 국내외 TV 카메라에 수시로 잡혔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파장이 클 수 있는 민감한 얘기를 공개하고 보도자료를 통해 자신이 테러단체와의 협상을 진두지휘했다고 공식화하기까지 했다.

김 원장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를 거쳐 2일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모든 행선지가 언론에 잡혔다. 내외신 기자들이 피랍자들을 취재하기 위해 진을 친 호텔에 이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선글라스를 쓴 국정원 직원'과 함께 출현한 것이나 피랍자들과 같은 비행기에 탄 것은 과잉 노출을 자처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특히 김 원장이 1일 두짓 두바이 호텔 로비에서 AP 통신의 카메라에 잡히던 시각, 탈레반 지도부의 한 간부는 "19명을 석방하는 대가로 한국 정부로부터 2000만 달러 이상의 몸값을 받았다. 그 돈으로 자살테러 폭탄 차량을 살 것"이라고 밝혔다.

김 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위임을 받아 몸값을 지불할 것인지, 얼마를 줄 것인지에 대해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한국 정부의 최고위직 가운데 한 사람이다. 몸값을 지불했다면 이른바 예산 편성 시 '총액주의 원칙'에 따라 구체적인 명세와 금액을 국회에 보고할 필요가 없는 국정원 예산이 제격이었을 것이란 얘기도 서울 외교가에서 나돌고 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의 카불행 이유를 "통신 감청의 위험성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몸값의 액수'를 감추기 위한 것이란 분석까지 정부 일각에선 나왔다.

전 세계 언론이 몸값 의혹을 제기하는 가운데 그의 대담하고 반복적인 노출은 '2000만 달러 몸값 주장'과 상관관계가 있는 듯 비치게 만들었다. '국정원장 노출 효과'인 셈이다.

우리 정부는 사건 초기 '테러단체와의 협상은 없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김 원장이 아프간으로 날아가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주도한 시기를 전후해 협상 지휘권은 외교부에서 국정원으로 넘어갔다고 한 정부 소식통은 설명했다.

이 소식통은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이 시작된 시점(8월 10일)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 일정이 발표된 직후였다"며 "평양을 두 번이나 찾아가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김 원장으로선 피랍 사건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보기관 책임자는 무덤까지 자신의 비밀을 가져가야 하는 자리"라며 "그러려면 노출과 과시를 피하고 익명과 모호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 원장은 과잉 노출과 업적 과시를 통해 그런 원칙을 일탈했다는 지적이다. 정보기관 출신의 한 인사는 "한국 정보기관의 위상의 추락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다.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국정원과 정보 협력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또 다른 정부소식통은 "피랍자들의 생명 안전과 국제원칙 존중이란 두 가지 원칙을 모두 지킨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입장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둘 중 한 가지는 완전히 무시당했다"고 말했다.

예영준 기자

김만복(61)=내부 승진 케이스로는 최초로 지난해 11월 국정원장이 됐다. 부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74년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들어갔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 국정원 기조실장, 1차장(해외담당)을 거쳤다.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가 지난해 말 베이징(北京)에서 북한 측 인사와 은밀히 만난 사실을 뒤에 그와 논의했을 정도로 386 실세들과 친밀한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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