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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콩팥’ 습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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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18면

영국 동남부에 있는 습지가 머금고 있는 물의 색깔은 옅은 원두커피와 비슷하다. 탄소분자 6개가 강강수월래를 하듯 육각형을 그리며 둘러선 페놀기를 가진 화합물이 많이 녹아 있어 그런 색깔이란다.

주일우의 과학문화 에세이-이미지에 걸린 과학 <12>

생태학을 공부하는 친구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화합물들은 물속에 잠긴 죽은 동식물의 썩는 과정을 늦춰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떠들썩한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쌓인 생물의 잔해들 덕분인지 습지에서 물을 빼서 만든 주변의 경작지 흙 색깔은 유난히 검다.

땅만 있거나 물만 있는 풍경보다는 둘 다 있는 것이 훨씬 보기가 좋다. 그런 의미에서 습지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다. 하지만 습지는 하천이나 연못, 혹은 늪으로 둘러싸인 축축한 땅이라 사람들이 쓰려면 항상 물을 빼내야 한다. 조금 성가실 수도 있지만 일단 물을 빼고 나면 기름진 땅이다.

물이 들던 곳이라 큰물을 만나면 곤란을 겪을 수는 있다. 경관은 좋지만 쓸모없는 땅이라 여겨 물 빼고 메워버리기 십상이었던 습지가 빼어난 가치를 지닌 것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자연의 저장 창고·댐인 습지
최근에야 사람들은 습지가 거대한 자연의 저장 창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습지에 차곡차곡 쌓였던 유기 물질들이 오늘날 기계문명의 에너지원인 화석연료가 됐다. 흐르는 물은 습지를 지나면서 침전물과 유기물을 잃는데 이것도 습지가 거르고 저장한다. 습지가 물을 정화하는 능력은 상당하다. 어떤 이들은 습지를 ‘자연의 콩팥’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습지는 물을 저장한다. 습지의 토양은 단위 부피당 저장할 수 있는 물의 양이 많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물길들이 나 있어서 비가 많을 땐 홍수를 막고 비가 없을 땐 물을 공급하는 자연 댐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표면으로 흘러나온 물을 효과적으로 흡수해서 토양의 침식을 막는다.

습지는 생명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이곳은 다양한 생물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풍부한 플랑크톤이나 유기성 분해 물질 덕에 수서 곤충과 어패류가 살기에 적당하다. 얕은 물과 수초지대는 물고기들이 알을 낳기에 좋고 어린 물고기들도 천적을 피할 수 있다. 새들도 이곳에서 쉬거나 먹이를 구할 수 있다.
또한 뭍에 사는 동물들도 이곳에서 물과 양식을 얻는다. 이들이 다시 파충류와 조금 더 큰 동물을 불러모아 먹이사슬이 이어진다. 다양한 생명들이 습지에 모여든다. 지구 상에 있는 습지 생태계의 생산력은 1년에 평균 1㎡당 3000g이 넘는데 이 수치는 열대우림 생태계의 경우와 맞먹는다.

경제적 가치 높은 습지
농지로 개간하기 전에는 별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던 습지가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다.
습지에서 고기 잡고 조개 주워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경제적 가치가 농업 생산보다 작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는 전 세계 어획고의 3분의 2가 습지에서 얻는 것이라고 한다. 습지가 없어졌을 때 물을 정화하기 위해 따로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것을 역으로 계산해 보면 습지가 가진 가치가 새삼 크게 느껴진다. 습지가 가지고 있는 동식물 자원과 에너지 자원도 경제적으로 가치가 크다. 요즈음 휴양·관광 자원으로서 습지의 가치는 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자연습지가 그렇게 많지 않고 분포도 일부 지역에 한정돼 있다. 삼면이 바다라 갯벌로 대표되는 해안 습지는 비교적 많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호수도 몇 개 안 된다. 하천의 배후습지가 동해안을 따라 조금 있고 늪이 낙동강 중류 지방에 띄엄띄엄 분포되어 있는 정도.
산지 습지로 대암산 용늪, 정족산 무제치늪, 제주의 오름 습지 등이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은 배후 습지로 분류할 수 있는 경상남도 창녕의 우포늪이다. 231만4060㎡(70만 평)에 이르는 우포늪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습지다.

한국의 대표 습지 우포늪
우포늪이 생긴 것은 1억400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지질학적으로는 한반도의 형태가 만들어질 때 함께 생긴 것인데 그때는 공룡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6000년 전에 빙하기가 지나면서 물이 더 흘러들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땅 위와 땅 밑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토평천과 연결돼 있어서인지 물 빛깔은 커피색이 아니라 평범한 강물과 다르지 않다. 아마도 이산화탄소 조절 기능을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
하지만 이 습지가 품고 있는 생명들은 아주 많다.

가시연꽃·생이가래·부들·줄·골풀·창포·마름·자라풀 같은 식물부터 쇠물닭·논병아리·노랑부리저어새·청둥오리·쇠오리·큰고니·큰기러기·뱀·장어·붕어·잉어·가물치·피라미·연못하루살이·왕잠자리·장구애비·소금쟁이·우렁이·물달팽이·말조개·두더지·족제비·너구리·남생이·자라·줄장지뱀·유혈모기·무당개구리·두꺼비·청개구리·참개구리·황소개구리 같은 생물들이 이곳에 산다. 다 헤아리면 이곳에 사는 생물은 2000종에 가깝다.

우포늪이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겨우 10여 년 전이다. 1997년에야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 그 이듬해 국제습지조약 보존습지로 선정됐다. 직접 가보면 그 아름다움이 주는 기쁨과 위안만으로도 이곳이 오래도록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버드나무 움이 트는 봄이나 억새와 갈대의 황금물결을 볼 수 있는 가을도 좋지만 우포의 절정은 여름이다. 마름·자라풀·생이가래·개구리밥 같은 수생 식물 덕에 물 위에 초원이 펼쳐지고 가시연이 덮은 곳은 물 위에 가죽을 덧대 놓은 것 같은 장관을 이룬다.

우포생태학습관에서 시작해서 물가를 어슬렁거리다 시간이 남는다면 바로 곁에 있는 화왕산에 올라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산의 평탄한 쪽은 억새가 우거져 있고 다른 쪽은 바위가 제법 가파르다.
옛날 사람들은 화산 활동이 활발했던 이 산을 불뫼, 혹은 큰불뫼라고 불렀다고 한다. 메기가 하품이라도 하면 바로 물이 든다는 창녕에 우뚝 솟은 화왕산 자락은 말 그대로 물과 불이 만나는 흔치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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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역사학.환경학을 공부한 주일우씨는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에 관심이 많은 과학평론가이자 문화공간 ‘사이’의 운영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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